
11부로 막을 내린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파인: 촌뜨기들’에서 임수정은 1970년대 신안 앞바다에 잠긴 보물선을 도굴하려는 ‘촌뜨기들’을 좌지우지하는 회장 사모님, 양정숙을 연기했다. 회사의 경리였지만 똑똑하고 셈에 밝은 면모를 눈여겨본 회장의 눈에 들어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양정숙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욕망에 솔직한 여자다. 돈줄을 쥐고 거친 도굴꾼들을 쩔쩔매게 만들 정도의 카리스마를 갖춘 그는 언젠가 회장의 눈을 피해 ‘욕망’의 정점에 서는 것을 꿈꾼다.
“사실 처음 제안받았을 땐 제 어떤 면을 보시고 이 캐릭터를 제안하셨나 궁금했어요. 원작에서도 정말 어마무시하게 무서운 사람이던데(웃음). 강윤성 감독님께서는 원작 속 양정숙의 핵심적인 부분들, 예를 들어 거친 남자들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 논리적인 언변과 카리스마를 많이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어요. 저도 거기에서 연기의 힌트를 얻었고요. 제가 이렇게까지 오직 자기밖에 모르고, 솔직하게 제 감정을 내뱉는 캐릭터를 맡아본 적이 없었잖아요? 연기하다 보니 진짜 신나게 몰입해서 하게 되더라고요(웃음).”
임수정에게 있어 양정숙은 ‘꿈에 그리던’ 제대로 된 첫 악역이기도 했다. 그랬던 만큼 제작진이 믿어준 것 이상으로 잘 해내고 싶었던 마음에 조바심으로 속앓이를 한 적도 있었다.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그의 순하고 청초한 인상이 양정숙을 완성하는 데엔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탓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이럴수록 변신에 성공했을 때 대중들에게 예상 이상의 큰 충격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게 된다. 그리고 임수정은 멋지게 성공해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외모와 성격을 갖췄지만, 원작과 달리 드라마 ‘파인: 촌뜨기들’ 속 양정숙에겐 특별한 차별점이 부여됐다. 그 역시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애정을 원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한 인간이라는 것. 도굴꾼 리더인 오관석(류승룡 분)의 조카, 오희동(양세종 분)에게 끌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정숙의 또 다른 욕망은 작품 속 가장 화제가 됐던 신 중 하나인 ‘밀실 베드 신’으로 이어졌다. 임수정은 욕망을 향한 정숙의 모든 행동이 스스로에게 진실됐듯, 희동을 향한 마음 역시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파인: 촌뜨기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착한 사람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도 그 안에서 한 명을 꼽는다면 오희동이죠. 어쩌면 정숙의 입장에서도 그동안 자기가 만나온 남자들과 비교하면 오희동이 뭔가 달라 보였을 거예요. 그래서 밀실 신 이후에 혼자서 자기 마음을 키워왔을 거고요. 원작의 정숙은 어떤 관계에서든 더 리드하고, 거침없는 모습을 보이지만 감독님께선 사랑에 있어서는 조금 서툴고, 기대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하셨어요. 그래서 뒤로 갈수록 정숙이 희동에 대한 마음을 홀로 키워가고 있는 게 확실히 보이죠.”
그렇다고 마냥 사랑에 휘둘려 본래의 목적을 포기하는 바보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도 양정숙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또 다른 차별점이자 특징이다. 신안 도굴꾼들을 쥐락펴락하는 것과 동시에 정숙은 건강이 좋지 않은 회장에게 술을 먹여 혼수상태에 빠지게 한 뒤 회장이 가진 모든 재산에 손을 뻗치게 된다.

“원래 대본엔 ‘정숙이 금고에 들어가 도장을 발견하고 기뻐한다’고만 적혀있었는데, 현장에 갔더니 감독님께서 ‘여기서 정숙이 맘보 춤 같은 걸 췄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웃음). 연습을 해 봤지만 잘 안 돼서 걱정이 컸는데 그걸 보시곤 감독님이 제가 민망할까봐 같이 춤을 춰주시기도 했어요(웃음). 그 신에서 정숙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도 그걸 찍을 즈음 제가 양정숙에게 완전히 몰입된 상황이라 저도 모르게 계산하지 않은 연기가 나왔던 것 같아요. 이렇게 완전히 ‘양정숙화’돼 있는 저를 보며 감독님이 정말 반가워 하시더라고요(웃음).”
이번 ‘파인: 촌뜨기들’ 속 파격 연기 변신으로 화제의 중심에 섰던 임수정은 현재 차기작인 tvN 드라마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의 촬영에 한창이다. 범죄스릴러에 블랙코미디를 장르로 앞세운 작품인 만큼 그가 여기서 또 어떤 낯선 얼굴을 보여줄지에 벌써부터 관심이 모이고 있다. 2001년 배우로 첫발을 떼고 20여 년을 보내며 이제는 장르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들에 욕심이 생겼다는 임수정은 양정숙을 발판으로 ‘확장된 임수정’을 보여주고 싶다며 힘주어 말했다.
“지금까지 해온 것도 반갑고 좋지만 이제까지 해보지 못한 것을 통해 깨닫는 것도 있거든요. 그 안에서 발견되는 제 새로운 목소리나 톤, 리듬감, 표정 같은 거요. 그렇게 새로운 걸 발견하는 시도를 더 해보고 싶은 거죠. 하지만 로맨스랑 멜로도 놓칠 순 없고요(웃음). 그런 장르의 작품이 또 제안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양정숙 저리가!’ 하면서 선택하게 되겠죠(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