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김준성 이수그룹 명예회장 | ||
김 명예회장은 지난 8월 24일 향년 87세로 별세했지만 말년까지 소설가이자 전경련 고문이라는 재계 원로로서 현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더구나 사돈이자 이수그룹을 인큐베이팅한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된 이후에도 이수그룹은 살아남는 것을 넘어 더욱 커졌다는 점에서 그가 평생 남다른 성취를 이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대표적인 TK 경제관료 인맥으로 고위관료에서 재벌회장으로 변신한 보기 드문 성공 케이스였다. 재벌 오너 이전에 그는 수출주도형 경제로 특징지워지는 3공화국의 경제지도를 그릴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는 그의 이력을 보면 더욱 도드라진다. 대구 출생으로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고보-서울대를 나온 김 명예회장은 초대 대구은행 총재를 7년간 지냈다. 이어 중앙무대로 진출한 그는 제일은행장을 거쳐 80년 한국은행 총재까지 지냈다. 그의 관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82년 1월 5공의 전두환 대통령이 그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발탁한 것. 그는 부총리 재임 시절 5공의 경제치적으로 내세우는 ‘물가안정’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총리직을 퇴임한 후에도 그의 성공가도는 계속된다. 은행연합회장 등을 지내던 그를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영입한 것.
87년 2월 그는 삼성전자 회장으로 영입됐고 그해 11월 이 회장은 별세했다. 그와 비슷한 때 영입된 영남 출신 고위 관료 인사로는 신현확 전 총리도 있었다. 재계에서는 이를 이 회장이 임종을 앞두고 이건희 회장에 대한 권력 이양기에 외풍을 막아줄 병풍으로 영남 출신 고위 관료를 영입했던 것으로 풀이하는 시각이 대세다. 김 명예회장이 그만큼 영남 인맥의 고위 관료 세계에 발언권이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김 명예회장은 삼성에 오래있지 않았다. 87년 12월 당시 신흥재벌로 떠올랐던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과 사돈이 된 것. 김 회장의 장녀 선정 씨(현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와 김 명예회장의 삼남 상범 씨(현 이수그룹 회장)가 결혼을 한 것. 대우그룹은 박정희 정권 말기인 70년대 중반 이후 몸을 불리기 시작했고 김우중 회장은 피난 생활을 대구에서 했지만 부친의 연고지가 제주도라 영남 쪽에는 별다른 연고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혼사가 있은지 한 달 뒤인 88년 1월 김 명예회장은 (주)대우 회장에 취임했다.
삼성의 ‘병풍’에서 대우의 ‘병풍’으로 자리를 옮긴 셈이다. 이어 외국유학 중이던 김 명예회장의 삼남 상범 씨도 93년 대우그룹 국제법무실장으로 합류하면서 재계에 신고식을 치렀다.
김 명예회장 부자는 95년 대우에서 분가해 이수그룹을 차림으로써 기업 오너로 변신했다. 매개는 이수건설. 이수건설이 이수화학을 인수하면서 재계에 이수그룹을 알리기 시작한 것.
결과적이긴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된 이후 김우중 회장의 숨겨진 재산찾기가 벌어졌을 때도 이수그룹은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선정 씨도 이수의 지배구조가 재편된 직후인 2003년 말 아트선재센터 부관장 자리를 내놓음으로써 공식적으로 친정인 대우그룹과의 모든 인연을 끊었다. 아트선재센터는 선정 씨의 모친인 정희자 씨가 운영하는 곳. 정 씨는 대우그룹의 공중분해 이후에도 필코리아리미티드 회장으로 포천의 아도니스골프장과 경주의 힐튼호텔과 선재미술관, 서울의 아트선재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당시 재계에선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이수그룹의 지배구조 재편과 김선정 씨의 사직을 묶어서 김우중 회장의 숨겨진 재산찾기와 관련지어 보기도 했다. 실제로 김선정 씨의 이수화학 지분과 정희자 씨의 아도니스골프장이나 방배동 자택이 김 회장의 숨겨진 재산이 아니냐는 송사가 있었다.
대우채권을 인수한 자산관리공사는 2003년 초 김우중 씨 은닉재산을 환수하기 위해 대우그룹 부도직전인 지난 98년 김 전 회장의 주식 24만여 주를 넘겨받은 김선정 씨 소유의 이수화학 지분 반환 소송을 냈다. 이 재판은 2006년 5월 대법원에서 명의신탁이 아닌 정상적인 증여라고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 정희자 씨 역시 관련 소송에서 정상적인 증여 절차를 거친 재산과 정 씨의 기업활동으로 이룬 것이라는 판결이 나와 아도니스골프장과 에이원골프클럽 등의 재산을 지킬 수 있었다.
어쨌든 김우중 회장과 관련해 불똥이 튈 조짐이 보이자 이수그룹에서 먼저 지배구조 개편을 통해 김상범 회장 중심으로 지배권을 확보하고 김선정 씨 지분은 이수건설로 몰아 만약의 사태에 대해 미리 방어막을 친 셈이다.
이렇게 ‘관재수’를 멀리한 김 명예회장은 99년 <21세기 문학>이라는 문학잡지의 발행인으로 변신했다. 2001년 이수그룹 명예회장으로 한발짝 현장에서 물러선 그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소설가 자격으로 언론과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가졌던 직함은 99년 8월에 취임한 (사)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부회장, 그리고 아들 상범 씨가 이수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후인 2000년 1월부터는 이수그룹 명예회장이었다. 그가 뱅커에서 고위경제관료, 기업인, 재벌 오너로 변신할 수 있었던 기본이 관·재계의 영남 출신 3공 인맥이었다는 점을 그도 잘알고 그 점을 늘 고마워했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같은 저간의 사정 때문이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