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제19기 지지옥션배의 초반 흐름은 숙녀팀에게 절망 그 자체였다. 신사팀의 선봉으로 깜짝 등판한 ‘돌부처’ 이창호 9단이 전성기를 방불케 하는 기량으로 파죽의 7연승을 내달리며 스코어는 순식간에 0 대 7까지 벌어졌다. 패색이 짙어진 팀을 구하기 위해 숙녀팀의 에이스 최정 9단이 조기 등판해 6연승으로 응수하며 6 대 7까지 추격했지만, 승부의 흐름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최정 9단은 자신의 천적이라 불리는 조한승 9단을 다시 만났고, 이른 시기에 성사된 빅매치에서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 이후 조한승 9단이 3연승을 추가하며 신사팀은 다시 승기를 잡았다. 위기의 순간, 오유진 9단이 조한승 9단의 연승을 저지하고 3연승을 거두며 불씨를 살렸지만, 다시 유창혁 9단에게 덜미를 잡혀 스코어는 9 대 11. 숙녀팀에게는 마지막 주자 김은지 9단 단 한 명만이 남게 되었다. 반면 신사팀은 유창혁을 비롯해 최명훈 9단, 목진석 9단이라는 쟁쟁한 기사 세 명이 버티고 있었다. 확률적으로 숙녀팀의 우승은 무척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김은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첫 상대 유창혁 9단과의 41세 차 대결에서 중반 위기를 극복하고 역전승을 거두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대국 후 “좌변에서 손해를 봐서 많이 안 좋다고 생각했다. 그 후 돌을 다 살리고 두텁게 처리되면서 조금씩 좋아졌다”고 복기하는 그의 모습에서 18세 소녀의 담대함이 엿보였다. 다음 상대는 지난해 같은 대회에서 자신에게 패배를 안겼던 최명훈 9단. 김은지는 심한 감기몸살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해 294수 접전 끝에 14집반 대승을 거두며 설욕에 성공했다. “오늘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는 말이 무색한 완벽한 승리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 3일, 양 팀의 마지막 주자가 만나는 최종국. 상대는 신사팀의 주장 목진석 9단이었다. 김은지는 “목진석 사범님이 남아 있어 그렇게 기쁘지 않다. 배운다는 생각으로 두겠다”며 겸손한 출사표를 던졌지만, 바둑판 위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초반부터 깔끔한 행마로 주도권을 잡은 김은지는 시종일관 안정적인 운영으로 목진석 9단을 압도했고, 결국 218수 만에 백 불계승을 거두며 12 대 11, 기적 같은 대역전 드라마의 마침표를 찍었다.
숙녀팀의 우승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지난 3년간의 아픔을 씻어냈다는 데 있다. 숙녀팀은 16~18기 대회에서 3년 연속 최종국에서 패배하며 우승컵을 내줬다. 공교롭게도 세 번 모두 최종 주자로 나선 최정 9단이 신사팀 주장 조한승 9단에게 패배한 결과였다. 최정의 어깨에 모든 짐이 지워졌지만, 결과는 늘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최정 9단이 또다시 조한승 9단에게 패하며 위기가 찾아왔지만, 팀의 마지막 보루로 등장한 김은지가 해결사 역할을 완벽히 해냈다. 이는 여자 바둑계의 패권이 서서히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2025년 9월 현재, 국내 바둑 랭킹에서 김은지는 30위, 최정은 33위에 올라 있다. 공식 랭킹에서 김은지가 최정을 앞지른 것이다. 한두 번의 승리를 넘어, 객관적인 지표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 김은지는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단체전 우승은 처음이라 더욱 기쁘고 뿌듯하다”며 “내년에도 최선을 다해서 많이 이기고 싶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김은지의 무서운 성장세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 답은 그의 독특한 공부법에서 엿볼 수 있다. 최근 김은지는 명인전에서 랭킹 10위 박민규 9단을 꺾은 후 이어진 인터뷰에서 바둑계의 상식을 뒤엎는 발언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바둑 공부할 때 따로 챙겨보는 기사의 기보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런 건 없다. 오직 인공지능(AI)으로만 공부한다”고 잘라 말했다.
과거 기사들이 선배 고수들의 기보를 복기하며 그들의 수를 배우고 자신의 기풍을 만들어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이다. 다른 사람의 수법을 모방하는 대신, 그는 오직 AI와의 스파링과 연구를 통해 자신만의 수읽기와 감각을 연마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공지능 시대에 등장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바둑을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AI를 단순한 참고용 도구가 아닌, 유일한 스승이자 파트너로 삼는 그의 방식은 바둑계에 새로운 훈련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지지옥션배에서 보여준 김은지의 바둑은 이러한 공부법의 결과를 증명한다. 정교한 수읽기, 냉정한 형세 판단, 그리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선의 수를 찾아내는 능력은 모두 AI와의 수많은 대련을 통해 다져진 것으로 분석된다. 18세 어린 나이에 여자 바둑의 정상에 우뚝 선 김은지 9단. AI라는 비급을 손에 쥔 새로운 바둑 여제가 어떤 역사를 써 내려갈지 주목된다.
유경춘 객원기자 master@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