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본관 건물. | ||
지난 10월 12일 각 언론 경제 관련 보도의 머리 부분을 장식한 것은 삼성전자의 지난 3분기 깜짝 실적이었다. 삼성전자는 이날 기업설명회를 통해 지난해 4분기 이후 세 분기 만에 2조 원대 분기 영업이익을 회복했고 매출은 16조 원을 넘어서며 사상 최대를 기록해 ‘어닝 서프라이즈(깜짝 실적)를 넘어선 드림 어닝(꿈의 실적)’이라 자평하기도 했다. 영업이익이 당초 증권가의 평균 전망치 1조 7000억 원을 크게 넘어섰고 상반기 내내 반도체 실적 부진으로 전전긍긍했던 점을 감안하면 ‘드림 어닝’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그러나 주식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코스피 지수 사상 최고치 경신 소식이 들려오는 와중에도 삼성전자 주가는 좀처럼 상승세를 타지 못했다. ‘꿈의 실적’이란 삼성전자의 자평이 무색할 정도였다. 지난 10월 12일 기업설명회가 있던 날 삼성전자 주가는 전날에 비해 2000원 오른 55만 7000원을 기록했으나 이후로 계속 떨어져 10월 24일 현재 51만 3000원에 이르렀다. 올 들어 부진을 면치 못하다가 지난 7월 중순 한때 68만 원대를 회복했지만 불과 3개월 만에 주가의 20% 이상이 빠져버린 것이다.
실적 호조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 주가가 맥을 못 추게 된 배경으로 향후 삼성전자 실적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작용했다는 평이 나돈다. 이건희 회장의 강한 질책에 따라 비용절감 구조조정 등 강도 높은 비상경영 체제를 가동해온 것에 비하면 그리 놀랄만한 실적은 아니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삼성 측이 반도체를 이어갈 신수종 사업 발굴에 나선 점 또한 투자자들의 삼성전자에 대한 기대감을 떨어뜨리는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10월 23일엔 황창규 반도체총괄사장의 성을 딴 ‘황의 법칙’(반도체 메모리의 용량이 1년마다 두 배씩 증가한다는 이론)이 8년째 이어졌다는 발표가 나왔지만 투자자들의 마음을 녹이기엔 역부족이었다.
삼성전자의 주 판매 무대인 미국에서의 최근 평가도 그다지 우호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미국 경제잡지 <비즈니스2.0> 최근호에 실린 ‘삼성의 정체성 위기(Samsung’s Identity Crisis)’란 제목의 칼럼은 ‘삼성이 미국 현지에서 기업 이미지를 고급화하지 못해 휴대폰 경쟁에서 노키아와 모토로라에 밀리고 있다’는 내용을 다루기도 했다.
일부 재계 호사가들은 최근 일부 계열사들에 대한 자산운용사의 지분율이 높아진 점에 우려를 표시하기도 한다. 특히 그룹의 신성장 동력과 관련돼 있거나 향후 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거론되는 계열사들에 대한 미래에셋의 지분이 늘어가는 점이 눈길을 끈다. 미래에셋 몫의 지분 향배가 급변할 경우 그룹에 타격을 미칠 수도 있는 까닭에서다. 외국계 투기자본인 소버린자산운용의 SK 경영권 침공사례를 통한 일종의 학습효과인 셈이다.
▲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 전무,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 | ||
미래에셋은 지난 7월 한 달 동안 삼성증권 주식 164만여 주를 사들여 지분율을 종전의 6.91%에서 9.36%로 높였고 10월 초 다시 71만여 주를 사들여 10.43% 지분을 확보하게 됐다. 이 기간 동안 삼성증권 주식 매집에 2000억 원 이상을 쏟은 미래에셋은 최대주주 삼성생명(11.38%)에 이은 2대 주주가 됐다. 삼성증권 지배구조에서 삼성 우호지분은 28%에 불과해 ‘삼성이 금융업 확대를 위해선 미래에셋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이란 말도 나돌고 있다.
이 회장의 두 딸들이 포진해 있는 제일모직과 호텔신라에선 미래에셋이 아예 최대주주로 군림하고 있다. 지난 4월 말까지만 해도 제일모직 지분 6.2%를 보유하고 있던 미래에셋은 지분율을 6개월 만에 두 배 가까이 늘려 11.32%에 이르렀다. 미래에셋은 호텔신라 지분도 13.99% 보유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 차녀인 이서현 상무보가 재직 중인 제일모직은 삼성석유화학(21.29%) 삼성엔지니어링(13.10%) 삼성정밀화학(3.16%)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 회장 여동생 이명희 회장이 신세계를 물려받은 것처럼 이 회장 아들 이재용 전무가 그룹 경영권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제일모직이 소그룹으로 분가될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한다. 최근 이 회장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가 삼성석유화학 지분 33.2%를 인수해 최대주주로 올라선 점 역시 딸들의 분가설을 부채질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제일모직과 호텔신라에서 차지하는 삼성 측 우호지분은 각각 7.49%와 16.56%에 불과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취약한 지배구조 때문에 미래에셋 지분 향배에 따라 그룹 경영권 승계과정이 비단길이 될 수도, 가시밭길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미래에셋은 최근 삼성물산 지분도 늘려 지분율 5.89%를 기록해 삼성 SDI(7.39%)에 이은 2대 주주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미래에셋은 지난 8월 23일~31일 700억 원 이상을 투자해 삼성물산 지분을 사들였다. 삼성물산은 주요 계열사 지분을 골고루 지닌 덕분에 정·관계에서 삼성 지주회사제가 거론될 때마다 지주회사 후보로 거론돼 왔다는 점에서 미래에셋의 행보가 주목을 받는다.
그밖에 삼성 내 권력구조를 둘러싼 소문들도 삼성의 향후 행보를 낙관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최근 몇몇 정보기관에선 ‘내년 초 정기인사를 앞두고 삼성 핵심 임원 세력들 간의 비방전이 심화되고 있다’는 내용의 첩보를 다룬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엔 한 임원의 아들이 삼성 계열사에 입사하고 부서 배치를 받는 과정에서 특혜를 누렸다거나 특정 임원의 가정사에 문제가 있다는 등 미확인 비방성 소문들이 제법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다.
오는 12월 1일 이건희 회장 취임 20주년을 앞두고 대규모 인사태풍과 이재용 전무의 경영권 승계 가능성이 거론되는 가운데 삼성 위기설을 부채질하는 일부 재계 인사들을 바라보는 이 회장의 심정이 씁쓸할 것으로 보인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