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윤영 전 KT 기업부문장(사장)이 KT의 차기 대표이사 최종 후보로 내정됐다. KT 이사후보추천위원회는 12월 16일 면접 심사를 거쳐 박 전 사장을 차기 CEO 단독 후보로 확정했다고 밝혔다. KT 이사회는 박 전 사장에 대해 “KT 사업 경험과 기술 기반의 경영 역량을 바탕으로 디지털전환(DX)·기업대기업(B2B) 분야에서 성과를 거둔 인물”이라며 “박 후보가 새로운 경영 비전 아래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마련하고, 변화와 혁신을 주도해 대내외 신뢰를 조속히 회복하며 이해관계자와의 협력 관계를 구축할 적임자”라고 소개했다.
박 내정자는 지난 6년간 KT CEO 선임 때마다 유력 후보로 거론됐던 인물이다. 1992년에 KT네트워크기술연구직으로 입사해 융합기술원 미래사업개발그룹장, 기업사업컨설팅본부장, 기업사업부문장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황창규 전 회장의 임기가 만료되던 2019년, 당시 구현모 후보와 막판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인 바 있다. 이어 구현모 전 대표의 연임 포기 이후 치러진 2023년 상반기와 하반기 CEO 선정에도 어김없이 숏리스트(최종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이번 인사는 그간 KT CEO 선임 과정에서 고질적인 문제로 꼽혔던 정치권 낙하산 논란을 차단하고 내부 사정에 정통한 ‘KT맨’ 출신이 발탁됐다는 점이 특징이다. KT는 오너가 없는 소유분산 기업이다. 이 때문에 매 CEO 선임 과정마다 정치권 입김을 피해가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남중수, 이석채, 구현모 등 기존 CEO들이 수사를 받고 교체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기업이 장기적인 방향성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번 숏리스트에는 주형철 전 SK커뮤니케이션즈 대표 등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사가 포함되면서 또다시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인물이 내려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여기에 최대주주인 현대차 진영과 가까운 홍원표 전 SK쉴더스 대표가 유력 후보로 부상하며 대주주의 경영 개입 논란까지 불거졌다. 정치권과 대주주가 얽힌 복잡한 삼파전 구도 속에서도 박윤영 내정자가 발탁되면서 KT 경영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회복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KT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지난번 이관섭 전 실장 논란 때처럼 정치권에서 공공연하고 노골적으로 간섭할 주체가 없었고, 대주주 또한 지분 매입 당시 경영 참여가 아닌 단순 지분 투자 목적을 명시했던 터라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라며 “박윤영 전 사장은 그간 CEO 선임 과정에서 항상 높은 평가를 받고도 외부 입김에 밀려 매번 ‘들러리’ 역할에 그쳐야 했으나 이번에 드디어 갈고닦은 역량을 보여줄 기회를 얻게 된 셈”이라고 말했다.

박윤영 내정자에 대해서는 ‘통신 본업의 경쟁력을 강화할 적임자’라는 평가가 나온다. 신민수 한양대 경영대학 교수는 박 내정자에 대해 “오랫동안 KT에 몸담으며 B2B를 이끌어온 만큼 영업력이 검증됐고, 특히 인프라 구축 분야에 기여도가 높아 네트워크에 대한 이해도가 탁월하다”며 “통신 기반 시설을 바탕으로 사업력을 확장하는 데 있어 과거와는 다른 추진력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박윤영 내정자가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특히 미래 성장 동력의 핵심인 AI 분야에서 KT가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KT는 최근 정부가 주도하는 ‘국가대표 AI’ 프로젝트 선정 과정에서 통신 3사 중 제일 먼저 고배를 마셨다. 조기 탈락으로 사실상 국내 AI 선도 경쟁에서 도태됐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장기 전략 부재 탓에 경쟁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KT는 2022년 구현모 CEO 재임 당시 통신 3사 중 가장 먼저 자체 AI 모델인 ‘믿음’을 만들었으나 김영섭 CEO가 부임하면서 ‘믿음’ 프로젝트는 사실상 중단 수순을 밟았다. 2024년 10월 효율을 강조하며 마이크로소프트(MS)와 협력해 한국형 AI 모델을 공동 개발하겠다고 발표했으나 MS와의 전략적 협력 또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국정감사에서는 MS와의 계약 내용이 불투명하다는 지적과 함께,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제휴가 과연 회사 이익에 부합하느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통신업계에서는 박 내정자 취임 직후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로 ‘AI 전략의 전면 재점검’을 꼽는다. 표류하고 있는 AI 사업의 명확한 방향성을 설정하고, 시장과 내부 구성원을 설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라는 지적이다.
신민수 교수는 “‘AI 데이터센터(AI DC)’에 집중할지, 온디바이스 AI를 포함한 ‘B2C’ 시장을 공략할지, 혹은 기존 강점인 B2B 솔루션에 AI를 접목하는 방향으로 갈지 가중치를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MS 및 오픈AI와의 협력 이슈, 구글 제미나이 등 경쟁 모델의 약진 등 대외적인 AI 지형 변화가 심한 만큼, 참모진과 함께 명확한 AI 로드맵을 수립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덧붙였다.
조직 수습 또한 당면 과제다. 특히 최근 ‘펨토셀(초소형 기지국) 해킹’ 사태로 KT 조직 전체가 상당한 충격을 받은 상황으로 알려졌다. 통신업계에서는 내년 3월 주주총회 전후로 지난 해킹 사건에 대한 정부의 고강도 제재나 수사 당국의 판단이 나올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취임 직후 외부 충격에 조직이 동요하지 않도록 체계를 정비하고 신속하게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리더십을 검증할 첫 번째 관문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게다가 2300여 명에 달하는 직원들이 소속된 토탈영업TF 역시 수습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곳은 2024년 대규모 구조조정과 자회사 분사 과정에서 전적을 거부하고 잔류를 택한 직원들이 배치된 곳으로, 토탈영업TF 직원들은 사실상 핵심 업무에서 배제된 채 방치되고 있는 상태다. 구조조정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직원들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는 부서기도 하다. 회사 내부에서도 숙련된 기술 인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하고 방치하는 것은 경영상 막대한 손실이자 비효율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어 박 내정자가 어떻게 내부 갈등을 봉합해 인력 구조 재편에 나설지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박 내정자를 두고 KT가 처한 위기 상황에 비해 ‘파격’과 ‘혁신’이 실종된 인사라는 쓴소리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통신업계 한 관계자는 “지금 KT에는 글로벌 투자를 유치하고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과감한 혁신가가 필요하다. 박 내정자도 평시였다면 훌륭한 리더였겠지만 지금은 KT의 AI 개발 역량을 판가름할 중요한 시기”라며 “외부 경력이 전무한 내부 관리자형 리더가 과연 거대 자본이 투입되어야 하는 AI 인프라 구축과 6G 시대를 위한 과감한 승부수를 던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제언했다.
이와 관련, 박윤영 내정자는 지난 12월 17일 “해킹 사태 수습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소비자 신뢰 회복과 흔들린 조직 정비에 전력을 쏟겠다”며 “또 KT가 국가 기간통신사업자인 만큼 통신 본연의 역량 강화가 필요하다. AI 사업은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