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빈 부회장과 신영자 부사장(오른쪽) | ||
2007년 후계구도의 밑그림을 완성한 대표적 재벌로는 현대백화점그룹이 꼽힌다. 현대가 3남 정몽근 명예회장의 장남인 정지선 회장이 지난 2002년 30세의 나이로 부회장에 올라 재계를 깜짝 놀라게 하더니, 2007년 12월 회장의 자리에 오른 것. 2001년 현대백화점 기획실장 이사로 입사한 뒤 6년 만이다. 사촌지간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 삼성의 이재용 전무, 신세계의 정용진 부회장 등 3세 경영인 중 가장 빠른 속도로 ‘회장’ 직함을 달았다. 현대백화점 지분도 17.10% 확보해 최대주주에 올라 있으며 정몽근 명예회장이 2선 후퇴한 상황이라 명실상부한 1인자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정 회장의 동생 정교선 현대백화점 전무는 현대백화점의 지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대기업을 상대로 식자재 등을 파는 현대H&S 지분 21.31%를 보유해 최대주주에 올라있다. 현대H&S는 100% 지분을 보유한 현대드림투어와 호텔현대를 비롯해 5개의 자회사를 두고 있다. 또한 청계천 일대와 압구정동 등에 알짜배기 부동산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정몽근 명예회장이 현대백화점과 현대H&S를 두 아들에게 나눠 주는 식으로 재산을 정리했으며 머지않은 장래에 분가가 이뤄질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정교선 전무의 현대H&S가 현대백화점 지분 12.44%를 가지고 있는 반면 현대백화점은 현대H&S 지분을 갖고 있지 않아 새해에 지분정리가 있을지 관심거리다.
한진그룹 역시 현대백화점만큼이나 2007년 후계자들의 약진이 두드러진 곳으로 평가받는다. 한진은 지난 12월 14일 실시한 대한항공 정기 인사에서 조양호 회장의 장녀인 현아 씨를 상무B에서 상무A로, 장남인 원태 씨를 상무보에서 상무B로 한 단계씩 승진시켰다. 2006년에 이어 1년 만에 다시 승진 명단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것.
아들 중심의 재벌가 관행과는 달리 누나인 조현아 상무가 남동생 조원태 상무보다 한 걸음 앞서나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러나 조현아 상무가 1999년 입사해 7년 만인 2006년에 상무B로 승진한 반면 조원태 상무는 2004년 입사해 단 3년 만에 상무B로 승진한 점도 지나칠 수 없다. 대한항공 지분도 조원태 상무가 0.03%로 0.02%를 보유하고 있는 조현아 상무보다 약간 앞서 있는 상태. 경영 경험과 직급은 누나가 앞서지만 성장속도는 남동생이 월등한 셈이다.
▲ 정지선 회장(위 왼쪽), 정교선 전무, 조현아 상무(아래 왼쪽), 조원태 상무 | ||
한진과는 대조적으로 롯데그룹의 후계 구도는 이미 아들 중심으로 짜인 상태다. 신격호 회장 장남인 신동주 부사장이 일본 롯데를 맡고 차남 신동빈 부회장이 한국 롯데를 맡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누나이자 신 회장의 장녀인 신영자 부사장을 향하던 시선은 조금씩 식어가고 있다.
신 부사장은 1980년 롯데쇼핑 부사장에 취임한 후 롯데백화점을 업계 1위로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러나 경영권 승계와 재산 분할 과정에서는 철저하게 남동생들 뒤로 밀린 듯하다. 애초부터 두 아들이 신격호 회장으로부터 롯데그룹 지배 근간이 되는 롯데쇼핑 지분을 각각 21%가량 증여받은 데 반해, 신 부사장은 단 1.22%를 받았을 뿐이다. 지난 2006년 2월 롯데쇼핑 상장으로 신동주-신동빈 형제 지분율은 각각 14.58%와 14.59%로 조정됐지만 두 형제는 누나인 신 부사장의 10배가 넘는 막대한 상장차익을 얻어 대조를 이뤘다.
2007년 초 신 부사장이 롯데쇼핑 등기이사에서 제외된 점 역시 ‘신동빈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신격호 회장의 의도로 풀이됐다. 동시에 신 부사장에겐 롯데면세점을 맡겨 사실상 분가작업에 들어갔다는 평을 들었다. 지난 연말 신 부사장은 42세나 어린 이복동생 신유미 씨와 함께 롯데후레쉬델리카 개인 공동 최대주주에 올랐지만 이 역시 신 회장의 아들 딸 구분 작업 일환이란 해석을 낳았다.
재벌가 후계구도를 성대결 관점으로 보는 시각은 ‘사위 경영’으로 유명한 동양과 오리온에게도 향한다. 슬하에 딸만 둘 두었고 이양구 회장은 자신의 경영권을 맏사위인 현재현 현 동양그룹 회장에게 물려줬다. 둘째사위인 담철곤 현 오리온 회장은 사장으로 근무하면서 제과와 엔터테인먼트 부문을 맡았다.
그러다가 지난 2001년 동양그룹이 동양그룹과 오리온그룹으로 분리되면서 두 사위의 ‘동거’는 끝이 났다. 현 회장이 동양그룹을 맡고 담 회장이 오리온그룹을 맡게 된 것. 그러나 재계 인사들은 여전히 두 딸과 장모인 이관희 씨의 영향력이 막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관희 씨는 동양메이저(1.45%)와 오리온(2.69%) 양 사의 3대 주주이기도 하다.
▲ 도하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셋째아들과 김승연 회장. 연합뉴스 | ||
담 회장의 장남인 서원 군은 아직 미성년자지만 이미 오리온 지분 0.54%를 확보해 대주주 명부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재계에서는 현 회장이나 담 회장 모두 한 명뿐인 아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줌으로써 다음 세대에서는 적어도 ‘문패’상으로는 ‘이씨’에서 벗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2007년 보복폭행 사건으로 수난을 겪은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도 해가 저물기 전 ‘의미 있는’ 증여를 해 눈길을 끌었다. 항소심 집행유예 판결 이후 일본에서 요양하던 김 회장은 지난 12월 15일 귀국하자마자 자신이 갖고 있던 ㈜한화 지분 300만 주를 세 아들에게 증여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총 2022억 원. 증여세만 1000억 원이 훌쩍 넘을 전망이다.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한화의 지분을 미리 세 아들에게 증여한 것은 후계 구도를 대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법한 일이다. 20대 중반 이하의 어린 아들들에게 거액의 증여세를 물어가며 지분을 물려준 것을 볼 때 김 회장이 갑작스런 선친의 작고로 20대의 나이에 총수에 오른 점이 작용했을 것이란 의견도 조심스레 제기된다. 보복폭행사건으로 한화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 떳떳한 증여로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것도 염두에 둔 듯하다.
한화 총수일가 역시 삼성이나 현대차의 경우처럼 비상장계열사 주식을 확보한 후 물량 몰아주기 등을 통해 몸집을 키워 그 차익으로 주요계열사 지분을 매입할 것이란 의혹을 받아왔다. 이와 관련, 김 회장의 세 아들이 지분 100%를 나눠 가지고 있는 한화S&C가 눈길을 끈다. 시민단체는 김 회장의 자식들이 이 회사의 주식을 평가가치보다 싼 가격으로 매입했다고 주장하지만 한화는 이를 극구 부인한다. 상장 시기 역시 정해져 있지 않다는 입장이지만 경영권 승계를 고려할 시점이 다가올수록 후계 작업에 필요한 상장 논의 역시 활발해질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