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지난 연말 삼성그룹 화학계열사인 삼성토탈 임직원들은 황당한 소식을 접했다. 유력 경제신문 <파이낸셜타임스>(FT)가 “한국의 호남석유화학이 2009년쯤 삼성토탈을 인수할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은 것. FT는 지난 12월 22일자에서 “대한유화공업과 삼성토탈이 석유화학업계 재편 바람이 불 것으로 보이는 2009년 이후 유력한 피인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호남석유화학(호남석화)은 롯데물산이 33.63%의 지분을 가진 최대주주며 호텔롯데와 일본롯데가 각각 13.64%와 10%의 지분을 갖고 있는 롯데그룹 계열사. 게다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차남 신동빈 부회장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수장을 맡아 경영능력을 검증받았던 곳이어서 애정이 남다른 것으로 전해지는 회사다.
이런 이유들로 민감하게 반응할 법한 소식임에도 재계와 증권업계는 시큰둥했다. 특히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대한유화와 삼성토탈이 매력적인 인수 대상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이들 업체가 매물로 나올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진단했다.
대한유화는 물론 삼성토탈을 비롯한 삼성그룹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런 기사가 나오게 된 배경은 이렇다. 호남석화의 한 임원급 인사가 FT와 인터뷰를 하면서 “지난 수년간 호황을 누려왔던 국내 석유화학업계가 내년부터 둔화 국면을 맞이하게 되고 2010년부터는 일부 업체의 경우 경쟁력 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석유화학업계에 기업 인수합병(M&A) 움직임이 나타날 경우 대한유화공업과 삼성토탈이 유력한 타깃이 될 것”이라며 회사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그는 삼성토탈의 경우 석유화학 부문이 주력 사업부가 아니라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발단은 지난해 초 공정거래위원회가 실시한 석유화학 회사들의 담합행위 조사에서 시작됐다. 공정위는 당시 고밀도폴리에틸렌과 폴리프로필렌 제품에 관해 석유화학 업계의 담합 조사를 시작하면서 “담합 행위를 자진 신고하는 업체는 선처하겠다”며 ‘당근’을 제시했다.
허원준 현 석유화학공업협회장을 비롯한 석유화학업계 CEO들은 당시 “담합을 한 사실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담합을 했다고 자진신고할 수 있느냐”며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런데 당시 석유화학공업협회장을 맡고 있던 이영일 호남석화 사장의 반응이 이상했다. 호남석화는 협회장 소속사일 뿐 아니라 유화업계 시장점유율 1위여서 담합사실이 발각될 경우 대규모 과징금을 부과받을 것이 뻔했다. 당연히 앞장서서 담합사실을 강력 부인해야 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호남석화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공정위는 2월 조사결과를 발표했는데 이를 본 유화업계는 경악했다. 공정위는 당시 “석유화학업체 10곳이 1994년부터 2005년까지 사장단 회의 등을 통해 가격 담합을 했다”며 무려 1051억 원에 달하는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 액수는 공정위가 생긴 이래 역대 세 번째에 해당하는 규모. 더구나 SK㈜ 대한유화 LG화학 ㈜효성 대림산업 등 5개 기업은 검찰에 고발까지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담합을 통한 가격인상은 소비자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는 점에서 발본색원을 당해 마땅한, 명백한 범죄행위다. 그런데도 유화업계가 “억울하다”며 목청을 높였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업계 1위로 담합의 수혜를 가장 많이 누렸던 호남석화는 정작 600억 원에 달하는 과징금과 검찰고발 모두를 면제받는 ‘특혜’를 얻었던 것.
더구나 공정위가 밝힌 호남석화의 면제사유는 유화업계 관계자들을 공분케 했다. 공정위는 당시 “호남석화는 가장 먼저 담합사실을 자진 신고해 이번 사건 해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이를 테면 내부고발로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는 얘기인 셈이다. 유화업계는 공정위의 발표가 있은 뒤 “자진신고를 했다지만 담합을 주도한 1위 업체는 강력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며 뒤늦게 반발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결국 지난 연말 공정위는 “석유화학업체들이 1994년 4월부터 11년간 비닐을 만드는 합성수지 제품의 가격을 담합 인상했다”며 또 다시 6개 업체에 500억 원이 넘는 과징금을 부과했다. 게다가 한화석유화학과 삼성토탈, SK에너지 등은 검찰에 고발되는 등 강력한 제재를 받았다.
그런데 이 조치에서도 여전히 호남석화는 과징금과 검찰 고발을 모두 면했다. 처벌을 피한 이유도 지난 2월과 똑같았다. 고밀도폴리에틸렌과 폴리프로필렌에 이어 합성수지 제품에 관해서도 호남석화가 유화업계 중 가장 먼저 공정위에 가격 담합을 자진 신고했던 것.
이쯤 되자 유화업계는 분노를 넘어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흔히 하는 말로 한 번 배신하기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다고 하지만 해도 너무했다”며 “유화업계에서 호남석화는 신뢰를 잃었다고 보면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업계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자 호남석화는 긴급히 진화에 나섰다. 호남석화는 지난 연말 업계가 상생기금 100억 원을 모금할 때 전체의 절반인 50억 원을 부담하고 FT의 보도에 관해서도 “인터뷰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 생긴 오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 정도 조치로 유화업계가 마음을 풀지는 미지수다. 올 상반기 또 한 차례의 담합조사 결과 발표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스티렌모노머(SM) 파라자일렌(PX) 에틸렌글리콜(EG) 등 유화업계의 다른 합성수지 제품의 담합에 대해서도 조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올 상반기 중 조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 결과가 발표되면 석유화학 업체들은 또 한 차례 과징금을 얻어맞을 것이 확실시되고 있으며 일부 회사는 추가로 검찰에 고발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