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1월 있었던 삼성그룹 비자금 규탄 및 처벌촉구를 위한 민노총 결의대회.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아래 사진은 김용철 변호사가 지난 13일 참고인 조사를 위해 특검 사무실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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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수사에 착수한 삼성 특검팀에 대해 당초 우려의 시선이 많았다. 검찰의 특별수사·감찰본부로부터 넘겨받은 자료들 외에 새로운 것을 더 찾아낼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이 퍼졌던 것이다. 지난해 10월 29일 김용철 변호사의 첫 비자금 폭로 이후 삼성그룹 안팎에선 주요 자료 폐기 소문이 줄을 이었다. 이러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로부터 석 달 가까이 지난 지금 삼성의 주요 사무실 안에 특검이 건져낼 만한 자료가 남아있겠냐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으며 이러한 시각은 자연스레 승지원에 대한 압수수색 가능성을 점치게끔 만들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본관 집무실보다는 승지원에 머물며 일을 보는 시간이 많을 정도로 삼성그룹 경영의 큰 방향이 이곳에서 종종 결정되곤 한다. 특검팀이 쳐들어오기 전에 과연 이 회장과 삼성이 승지원 압수수색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승지원 수색 다음날인 15일 특검 수사팀은 ‘예상대로’ 태평로 삼성본관 전략기획실을 덮쳤다. 이후 김용철 변호사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비밀금고가 전략기획실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소식이 알려졌지만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재계 인사들은 ‘과연 특검팀이 전략기획실 안에 삼성 비밀금고가 남아있을 거라 기대하고 들어갔을까’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는 삼성 직원들이 이번 압수수색에 대해 당황하기나 했을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이런 까닭에 일각에선 “특검팀이 차후에 어떤 카드를 꺼내들지 삼성에 물어보라”고 꼬집기도 한다. 16일 KBS 보도에 따르면 지난 2003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 당시 김인주 전략기획실 사장이 검찰조사 과정에서 전략기획실 내 비밀금고 존재 확인 진술을 했다고 한다. 당시 검찰은 삼성 비밀금고를 찾아내기 위한 압수수색을 하지 않았다.
김용철 변호사는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2003년 대선자금 수사 직후에도 삼성이 비밀금고를 전략기획실에 그대로 뒀다”고 밝힌 바 있다. 김 변호사를 비롯해 삼성에 비판적 시각을 지닌 인사들은 김 변호사의 비자금 발언이 터져 나온 직후 삼성이 비밀금고를 따로 처리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KBS 보도대로 김인주 사장이 2003년 당시 검찰 조사과정에서 비밀금고 관련 내용을 풀어놓았다면 이를 삼성 고위층이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삼성이 전략기획실 내 비밀금고를 폐기하지 않았다면 이는 당시 검찰이 압수수색을 단행하지 않을 것이란 내부 확신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얼마 전 특검의 압수수색에서 비밀금고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삼성이 특검팀의 전략기획실 압수수색을 충분히 예측하고 대비했기 때문이란 이야기로 연결된다. 예나 지금이나 삼성은 수사팀이 어떻게 움직일지 훤히 꿰뚫어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을 수사 중인 조준웅 특별검사. 특검팀이 계좌추적과 임직원 소환조사로 수사방향을 돌리면서 그 성과가 주목되고 있다. 연합뉴스 | ||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의혹 사건 수사 당시 이건희 회장의 소환 문제가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 다른 대기업 인사들 사이에선 ‘현대차 정몽구 회장은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 수감됐는데 삼성에선 고작 이건희 회장이 소환되느냐 마느냐를 중요시 여기는 전선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형평성 논란이 제기된 바 있다. 이 회장의 검찰 소환 여부가 정 회장의 구속 건에 비유되는 분위기를 삼성이 적극 조성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에버랜드 사건에서 피고인 신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파문에선 엄청난 금액의 차명계좌와 비자금 조성을 지시할 수 있는 인물로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 등과 더불어 이 회장의 얼굴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승지원 압수수색 직후 삼성이 공개적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데는 ‘승지원 습격’이 이 회장의 소환조사만큼이나 큰 상징성을 지닌 것이라는 공감대 조성 의도가 깔린 것이라는 해석이 제기된다. 즉 지난 에버랜드 수사 당시 ‘다른 재벌총수 구속에 버금가는 이 회장 소환’이란 인식을 확산시킨 것처럼 이번 역시 ‘승지원이 삼성에게 어떤 곳인데…, 다른 총수 소환만큼이나…’란 인식 확산에 주력할 것이란 지적이다.
에버랜드 사건 당시 이 회장 소환 논란이 제기됐다가 수그러든 만큼 당시보다 더 큰 파급효과를 몰고 온 비자금 파문을 수사하는 특검 입장에서 이 회장에 대한 소환조사를 피할 이유가 딱히 없어 보인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들과 재계 정보통들 사이에선 ‘이 회장의 소환이 아니라 기소를 막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란 이야기가 나돌 정도다.
‘관리의 삼성’이 이미 예상돼온 특검 수사팀의 승지원 압수수색에 대해 ‘호들갑’을 떨고 나선 것에 대해서도 같은 시각이 제기된다. 이번 비자금 파문의 전선을 ‘이 회장 소환 여부’에서 ‘이 회장 처벌 여부’로 확전시키지 않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는 지적이다. 이렇다 보니 삼성이 이 회장 소환 이슈를 부각시켜 ‘소환되는 것만으로도 이 회장에게 엄청난 형벌’이란 인식을 확신시킨 뒤 소환만으로 이번 사태를 끝내려한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