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검 칼날이 삼성 수뇌부를 향해 가면서 총수일가의 구세주가 나타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
지난 1월 14일 이건희 회장 집무실 승지원을 시작으로 특검은 삼성을 상대로 한 대대적인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룹 전략기획실이나 주요 계열사 창고 등에서 단번에 삼성 최고위층을 옥죌 만한 자료를 건져내지는 못했다. 삼성에버랜드 창고에 있던 미술품들을 발견해 비자금으로 구입한 의혹에 대한 조사도 벌였지만 이번 사건의 키워드를 풀어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특검 수사팀의 압수수색은 너무나도 당연한 절차지만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은 삼성을 상대로 한 공세에서 수뇌부를 직접 압박할 수 있는 증빙자료를 건져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한때 특검 수사팀 안팎에서 ‘특검 압수수색이 사전에 삼성에 의해 파악되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마저 나돌았을 정도다(<일요신문> 819호 참조).
이렇다보니 삼성 비자금 파문의 실체를 밝혀줄 열쇠는 역시 증인의 결정적 진술 확보일 것이란 지적이 제기된다. 그런데 이마저도 간단치가 않다. 동행명령에 대한 위헌 결정 때문인지 특검이 소환 통보한 삼성 인사들 중 한 사람도 제 발로 제 시간에 맞춰 나타난 경우가 없다고 한다. 특검 입장에선 증인들이 조사받으러 나오게끔 만들 압박용 카드가 필요한 셈이다.
일각에선 최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에 내려진 출국금지 조치가 삼성 측 다른 증인들을 효과적으로 조사하기 위한 방편일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특검 수사팀에 의해 홍 회장이 거론되면서 지난 2005년의 ‘안기부 X파일 사건’이 다시 들춰질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러나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의 대 검찰 로비’ 주장으로 검찰 조직 조사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는 특검이 이미 검찰의 수사가 끝난 X파일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재조사를 펼칠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안기부가 불법 감청한 자료에 홍 회장이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학수 부회장과 나눈 정치자금 제공 및 떡값 검사 관련 대화내용이 담겨있다는 점에 착안, 이 부회장 압박용으로 홍 회장을 출국금지시킨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지난 1996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당시 중앙일보나 삼성물산 같은 법인 주주들이 대부분 실권하면서 이재용 전무 등에게 전환사채가 헐값 배정됐다는 의혹이 에버랜드 사건 재판의 빌미가 된 바 있다. 실권 과정에서 이학수 부회장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정황파악에 특검이 주력할 수도 있다. 이건희 회장 부인이자 홍 회장 누이인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을 겨냥한 듯한 특검의 미술품 수색작업이 홍 회장 출금조치와 맞물려 이뤄진 점도 주목할 만한 사안이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하는 새 정부 세력 안에서도 삼성 특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 일부 중진 의원들 사이에서 ‘이건희 회장 용퇴, 재무파트 고위인사 기소’ 의견이 제기돼 이명박 당선인에게도 전달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대운하 공사 등 새 정부가 기획하는 대규모 경제 정책이 산재한 상황에서 삼성그룹에 직접적 타격을 가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작용한 듯하다. 소환 대상자들이 이건희 회장의 차명계좌·비자금 조성 관련 정황에 대한 직접 진술을 할 가능성이 낮다는 판단 하에서 특검 조사 완료 시점(4월 중순)에 삼성 파문을 종결지을 안을 제시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정·관계와 수사당국을 향해 안테나를 날카롭게 세우고 있는 삼성이 이건희 회장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어떤 방법을 택하게 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특검 출범 이전에 삼성 비자금 파문을 담당했던 특별수사·감찰본부(특본)가 ‘차명계좌·비자금 관련한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들이 대부분 맞다’고 밝힌 상태에서 특검이 수사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분명 삼성에 큰 부담일 것이다.
김 변호사의 차명계좌와 비자금 관련 주장이 특검 수사결과 사실로 밝혀진다면 삼성의 최고위선의 지시나 승인 없이 절대로 이뤄질 수 없는 일이란 공감대 형성을 피할 수 없다. 자연스레 시선은 이건희 회장을 향하게 될 것이다.
특검에 앞선 특본 수사과정에서 김석 삼성증권 부사장이 지난 1996년 말 실권된 에버랜드 전환사채 인수 여부를 이재용 전무에게 확인하지 않았다며 기존 진술을 바꾼 사실이 공개돼 화제가 됐다. 지난 2005년 숨진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 박 아무개 상무의 부탁 때문이었다고 진술한 것이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는 지난 1월 3일 논평을 통해 ‘그룹지배권 승계가 달린 문제를 숨진 박 전 상무가 혼자 기획하고 진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고 꼬집은 바 있다. 고인에게 뒤집어씌우려 한다는 것이다.
특검 안팎에선 소환돼 오는 삼성 측 인사들이 미리 입을 맞춰놓고 조사를 받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일각에선 삼성이 앞선 박 전 상무의 예를 답습하고 있을 가능성을 거론한다. ‘비자금 조성이 이미 이병철 선대회장 때 이뤄진 일’이라는 주장이 특검 안팎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대목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세상을 떠난 박 전 상무의 경우처럼 특검의 직접 조사가 불가능한 동시에 이건희 회장이 비자금 조성의 주역이란 오명을 벗어던질 명분이기도 하다. 이 회장이 비자금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단순히 물려 받기만한 사람이라면 이번 기회에 해당 금액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거액의 증여세를 출연하면서 사죄를 청할 수도 있는 셈이다.
삼성의 주력 계열사들 안팎에선 ‘이건희 회장 취임 20주년 특별 상여금이 책정됐다가 비자금 사건으로 오해의 여지가 있어 취소됐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뒤숭숭하다고 한다. 잿빛 불안감에 뒤덮여가는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질 구세주가 나타날지에 관심이 쏠린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