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 가장 깊숙이 개입된 것으로 알려진 이학수 부회장이 지난 14일 조준웅 특검 사무실에서 조사를 받은 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 ||
특히 최근 특검 수사방향이 삼성 총수일가의 경영권 승계 쪽에 맞춰지면서 수사팀이 ‘삼성 황태자’ 이재용 전무를 정조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삼성 임직원들의 ‘모르쇠 전략’에 학을 뗀 수사팀이 황태자의 도덕적 치부를 겨냥하고 나서며 이 전무가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 법무팀장)는 이번 사태의 빌미가 된 비자금 차명계좌 조성을 지시한 인물로 이학수 부회장을 거론한 바 있어 오래전부터 이에 대한 특검팀의 집중 추궁이 예상돼 왔다. 그러나 소환조사를 받아온 삼성 임직원들이 “차명계좌는 내 것”이라 일관되게 진술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이 부회장 역시 앞으로도 순순히 차명계좌 조성 지시 관련 언급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까닭에 이 부회장 소환 목적에 비자금 차명계좌 문제와 더불어 삼성 총수일가 경영권 승계 건이 포함돼 있음에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지적하는 인사들도 있다. 이 부회장이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발행과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 그리고 e삼성 고발 사건 등의 피고발인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재용 전무에 대한 재산 증여 의혹과 관련된 사건들이다.
이 부회장은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이건희-이재용 부자 승계과정에 가장 깊숙이 개입돼 있는 인물이다. 삼성 전략기획실을 이끄는 이학수 부회장-김인주 사장 라인에 대한 특검의 본격 조사는 앞으로 진행될 이재용 전무 소환조사에서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제대로 몰아붙이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풀이되고 있다. 삼성에버랜드 사건 수사 당시 검찰 주변에서 이 회장 소환설이 무성했다가 종적을 감춘 것과는 달리 이번 특검 수사팀은 이 회장 부자 소환을 공개 선언한 상태다.
특검 수사팀은 이건희 회장 일가가 부적절하게 조성한 재산이 있는지, 세금을 제대로 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과세 자료 조사에 들어갔다. 이 조사의 핵심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재용 전무의 재산 형성 과정이다. 경영권 승계에 필요한 지분을 획득하면서 세금을 제대로 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특검팀이 삼성에버랜드 사건 변호를 맡았던 ‘법률사무소 김앤장’에 지급한 수임료가 이재용 전무와 이 회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의 개인 계좌에서 지급된 사실을 확인한 것도 논란거리다. 삼성이 조성한 비자금이 이 전무 등의 계좌를 통해 김앤장에 전달됐을 가능성에 특검팀이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이 전무를 향한 특검팀의 칼날을 막는 장애물들도 없지 않았다. 특검팀의 이건희 회장 일가 과세 자료 요청에 대해 국세청이 한때 국세기본법의 개인정보 공개 금지를 근거로 난색을 표해 수사가 지연되기도 했다. 이 전무 등의 계좌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청구는 ‘영장 범위가 너무 포괄적이고 소명이 주목하다’는 이유로 법원이 기각했다.
▲ 이건희, 이재용 부자 | ||
이학수 부회장 소환에 앞서 측근 격인 김인주 사장이 먼저 소환될 것이란 세간의 예상이 깨진 것에 대해 수사팀 주변에선 ‘삼성 총수일가 압박용’이란 해석을 내놓는다. 삼성에서 이 부회장 위로는 이건희 회장 일가밖에 없는 까닭에서다.
지난 1월 10일 시작된 삼성 특검의 1차 수사기간은 60일이며 이후 각각 30일과 15일 이내에서 두 번 연장이 가능하다. 최장 105일간 진행 가능한 이번 특검은 4월 중순쯤 마무리될 전망이다. 1차 수사기간 종료시점이 다가오는 터라 수사연장에 대한 명분이 필요한 특검팀이 곧바로 총수일가 압박에 들어갔다는 평이다.
삼성 측의 일치단결로 수사진척에 애를 먹는 특검팀은 비자금 차명계좌에 대한 조사를 꾸준히 벌이는 동시에 총수일가 일원들을 압박하는 전술을 활용해왔다. 삼성에버랜드 창고 등을 뒤져 고가 미술품들을 찾아내려 애를 썼는데 다분히 이 회장 부인 홍라희 씨를 겨냥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용철 변호사는 홍 씨 등이 고가미술품을 구입하는 데 비자금이 활용됐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정·관·재계에선 삼성이 여전히 검찰·법조계와의 물밑 대화를 통해 삼성에 대한 수사팀의 정서를 엿보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일각에선 이 전무에 대한 특검의 강공 드라이브가 이미 수사팀을 향해 안테나를 길게 세워놓은 삼성에 대한 ‘총수일가 치부를 모두 드러내기 전에 삼성이 알아서 협조하라’는 메시지 전달용일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수사팀 주변과 정·관·재계에선 ‘가족 동시 처벌 불가론’에 대한 이야기도 흘러 다닌다. 아버지와 아들이 공범일 경우 우리나라 정서상 둘 중 한 사람만 기소돼왔다는 것으로, 이는 현대차 비자금 사건에 곧잘 비유되기도 한다. 정몽구-정의선 부자에 대한 동시처벌을 피하기 위해 당초 정의선 사장만의 구속이 예정됐지만 정몽구 회장이 아들을 위해 스스로 구치소행을 택했던 일이 회자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수사팀이 이건희-이재용 부자 중 적어도 한 사람은 기소가 가능하다는 식의 공감대를 조성하려는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앵무새처럼 반복돼온 삼성 임직원들의 비협조적 진술 자세에 대한 일종의 엄포로 풀이되는 것이다. 특검 수사팀이 이 전무의 그동안 행적 하나하나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상황에서 삼성 측이 지금껏 활용해온 모르쇠 전략을 언제까지 고수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