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측의 ‘쇳물 전쟁’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국내 철강재 가격과 물량 공급을 주물러온 포스코가 다른 철강 업체들과의 역학관계를 동원해 몰아붙이는 반면 정몽구 회장이 직접 나서 진두지휘하는 현대차그룹이 받아치는 기세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국내 철강재 공급을 독식해온 포스코와 포스코의 최대 수요처이면서 얼마전 고로(용광로) 건설 추진으로 제철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현대차그룹의 서로를 향한 열기는 고로에서 뿜어내는 쇳물만큼이나 뜨거워지고 있다.
지난 2월 22일 포스코 주주총회가 끝난 뒤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기자들과 만나 “철광석과 석탄 가격 인상으로 철강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포스코는 고로를 통해 쇳물을 만드는데 이 과정에 원료로 쓰이는 것이 철광석과 석탄이다. ‘자고 일어나면 철광석과 석탄 값이 오를 정도’로 대변되는 요즘 시장 상황이 포스코의 가격 인상 요인이 된 셈이다.
핵심은 고로에서 쇳물을 통해 만들어내는 핫코일(열연강판)이다. 주총장에서 윤석만 사장은 “4월 이후 핫코일 가격 인상을 검토할 것”이라 밝혔다. 국내 철강업체들이 포스코로부터 핫코일을 사다 쓰는 실정이라 포스코의 핫코일 가격 인상은 다른 업체들의 부담으로 전이될 수밖에 없다. 핫코일 공급량이 부족해 업체들은 포스코 제품에 비해 질이 현격히 떨어지는 중국산을 일부 사다 쓰는데 그 값이 포스코 물건보다 높다고 한다. 시중에선 포스코 제품을 중국산이라 속여서 더 비싸게 파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핫코일을 원료로 해서 냉연강판을 제작 판매하는 현대차그룹 계열 현대하이스코 역시 포스코의 시장점유율과 가격 인상 여파를 혹독히 겪을 회사 중 하나다. ‘원료 값이 인상되면 제품 가격도 올리면 그만’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전언이다. 철강업계의 한 관계자는 “포스코도 냉연강판을 만드는데 국내 시장 점유율이 70%를 넘는다. 매년 수조 원을 벌어들이는 포스코는 냉연강판 가격을 크게 올리지 않아도 별 상관이 없지만 포스코 제품보다 더 비싸게 팔 수 없는 다른 업체들은 손실이 불가피하다”고 밝힌다. 포스코는 지난 1월 냉연강판 가격을 톤당 6만 5000원 인상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몇 년 만에 소폭 인상한 것일 뿐’이란 다른 업체들 푸념이 뒤를 따른다.
현대차그룹의 현대제철이 당진에 고로 제철소를 짓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국내 철강시장 구조 때문이다. 현대·기아차의 폭발적 철강재 수요 때문에 포스코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포스코의 최대고객 중 하나인 현대·기아차 물량을 그룹 안으로 돌려놓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현대차는 지난 2001년 자동차 냉연강판 공급문제로 포스코와 법정분쟁을 벌였던 바 있다. 얼마 전엔 포스코 출신 현대제철 직원들에 대해 포스코가 기술 유출 혐의로 고소해 결국 해당 직원들이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평소 포스코가 철강재 가격과 물량을 쥐락펴락하는 것에 대해 노골적 불만을 표시해온 것으로 알려진 정몽구 회장이 여러 부침을 겪으면서도 포스코 따라잡기 전의를 불태우는 것이다.
최근 현대제철은 러시아의 메탈로인베스트 등 3개사로부터 철스크랩과 선철 대체재에 대해 연간 100만 톤씩 공급 계약을 맺었다. 포스코 물량에 좌지우지되는 철강시장 구도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정 회장의 의지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업계에선 포스코가 현대제철을 제외한 나머지 철강회사들과의 관계를 이용해 현대차그룹의 철강 시장 입지를 약화시킬 가능성이 관측되고 있다. 포스코는 미국 최대 철강업체인 US스틸을 비롯해 세아제강과 손을 잡고 미국에서 석유 천연가스 수송용 강관 공장을 짓는다. 포스코와 US스틸이 각각 35%씩, 세아제강이 30% 비율로 지분 참여를 하게 된다.
포스코는 이미 지난 1986년 US스틸과 합작해 법인을 세운 전력이 있고 두 회사가 한·미 대표하는 철강업체인데 여기에 세아제강이 참여하게 된 점이 업계인사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세아제강을 비롯한 국내 철강업체들과 포스코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포스코가 가격 물량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국내 철강업체들 운명이 뒤바뀔 수 있기 때문에 포스코 눈치를 많이 본다. 현대제철처럼 따로 제철소를 건립할 수 없다면 포스코의 ‘군기 잡기’에 적극 동참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 현대제철에 공동 전선 구축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국의 카네기’로 불리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행보가 포스코와 현대차의 신경전에 새로운 변수가 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대기업 정보통들 사이에선 ‘박 전 회장이 최근 정·관·재계 인사들과의 자리에서 이구택 회장을 비롯한 현 경영진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돌고 있다. 국민의 혈세를 근간으로 만들어진 포스코가 철강산업을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철강보국’의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만 가고 있다는 지적인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운동 과정에서 박 전 회장과 독대해 여러 시간 이야기를 나눈 이후 교감설이 퍼졌던 바 있다. 현 정부가 포스코를 바라보는 시각에 박 전 회장의 그림자가 묻어날 수도 있는 셈이다.
반면 현대차그룹은 정몽구 회장 동생 정몽준 의원이 여권에서 입지를 강화해가는 점만 보더라도 현 정부와 친화적 관계를 맺어나갈 가능성을 보여준다. 청와대가 ‘쇳물 전쟁’에 여념 없는 포스코와 현대차에 어떤 잣대를 들이댈지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