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검이 삼성 측에 우호적으로 돌아가는 분위기지만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서 ‘떡밥’을 그냥 놓치고 지나갈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진은 이건희 회장과 삼성생명 전경. | ||
지난 3월 13일 삼성 특검팀이 ‘e삼성 의혹’ 핵심인물인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 등에 대해 불기소 처분했다는 소식에 진보신당이 내놓은 논평 내용이다. 삼성 의혹을 제기한 전 삼성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와 함께해온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특검의 수사 의지를 의심하고 나선 데 이어 이 전무 불기소 방침까지 더해지자 ‘특검 무용론’과 ‘면죄부 논란’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정·관·재계 일각에서 그동안 십자가를 짊어질 거라 여겨졌던 이학수 부회장(삼성 전략기획실장) 입지에 큰 변화가 없을 가능성이 조심스레 제기되면서 이른바 ‘삼성 사태’ 주역들이 모두 무탈할 것이란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토대로 삼성이 무작정 장밋빛 결과를 예측해도 될지는 의문이다. 김용철 변호사가 제기한 삼성의 현 정부 각료 로비설에 청와대가 강경 반응을 보이면서 삼성 특검 수사가 갈 곳이 정해졌다는 비아냥거림도 나오지만 아직 삼성이 넘어야 할 고개는 제법 남아 있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삼성 입장에선 무엇보다도 이재용 전무의 부실 경영으로 삼성 계열사들이 거액의 부담을 지게 됐다는 이른바 e삼성 의혹이 결국 ‘이 전무 불기소’ 방침으로 귀결된 점에 반색할 것이다. 계열사들의 e삼성 투자 과정이 이사회 논의를 거쳐 적정 가격에 주식을 매수한 것이라면 배임행위라 보기 어렵다는 것이 특검의 논리다. 이로써 이 전무가 사업 실패로 사회적 명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해 계열사 부담으로 떠넘겼다는 오명을 벗게 된 것이다.
한편 김용철 변호사의 새 정부 인사 로비 폭로에 대해 청와대는 상당히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떡값 각료’로 지목된 이종찬 청와대 민정수석은 ‘강력한 법적 대응 검토’를 시사했고 김성호 국정원장 내정자도 “국가 정보라인을 무력화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라고 표현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알려진 이 대통령의 반응은 “안타깝다”는 말뿐이었지만 이 대통령이 의혹 당사자들에게 더 강력한 대응을 주문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김 변호사의 주장을 ‘근거 없는 폭로’로 보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의 이 같은 반응 직후 단행된 검찰 인사에 ‘떡값 폭로’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임채진 검찰총장과 함께 ‘떡값 검사’로 지목됐던 이귀남 대검 중수부장이 대구고검장으로 한 단계 올라서 건재를 과시했다. 정·관·재계 인사들은 아무리 특검팀이라도 삼성 로비 대상으로 지목된 검찰·법조계 선후배들을 이 잡듯 뒤지기는 부담스러울 것으로 관측해 왔다.
한나라당에서도 김성호 국정원장 내정자 국회인사청문회의 출석 거부 의사를 밝혔던 김용철 변호사의 로비 주장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렇다 보니 세간에선 ‘현 정권하에서 삼성 수사에 더 이상 탄력이 붙기는 어려울 것’이란 비아냥거림까지 흘러나오는 상태다.
이처럼 특검 수사가 막바지를 향해 가면서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김인주 사장의 거취에도 관심이 쏠린다. 삼성 측에 따르면 김 사장은 본인의 연임 고사로 인해 조만간 삼성전자 등기임원 명부에서 이름을 내리게 될 전망이다. 김 사장은 삼성의 헤드쿼터인 전략기획실에서 이학수 부회장 다음가는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특검 수사 종료 이후 누군가 옷을 벗게 될 것이란 흉흉한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김 사장의 등기임원 제외는 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특검 수사상황과 전망이 종전에 비하면 삼성 측에 우호적으로 돌아가는 듯한 분위기지만 그렇다고 삼성이 샴페인 뚜껑을 만지작거릴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우선 이 전무 불기소로 한숨 돌린 e삼성 의혹을 시민단체들이 재점화할 것으로 보인다.
참여연대는 e삼성 건과 관련해 지난 2005년 10월 이 전무와 지분 매입에 참여한 계열사 임원들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한 바 있다. 특검 수사발표에 시민단체들과 정치권 일각이 강력 반발하는 만큼 이 사건 또한 항고를 통한 장기화 수순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에버랜드 사건이 지난 2000년 6월 법학교수 43명의 검찰 고발 이후 무려 8년을 끌었음에도 마무리되지 않는 점만 봐도 e삼성 사건이 세인들 뇌리에서 쉽사리 지워지긴 어려울 전망이다.
4·9 총선을 향한 정치권의 이전투구가 삼성 의혹 같은 ‘떡밥’을 그냥 놓치고 지나갈지도 관심이 쏠린다. 대선 참패 후유증 속에서 ‘총선 올인’을 선언한 통합민주당 등 야권이 핀치에 몰릴 경우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을 ‘친 삼성 집단’으로 규정해 물고 늘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검에서 아직 조사 중인 사안들 중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의혹 사건과 삼성생명 차명주식 의혹 건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도 관심사다. 조준웅 특별검사는 e삼성 사건과 관련, ‘이재용 전무 불기소’ 방침을 발표하면서도 ‘삼성 구조조정본부가 이 전무 지분 매각 과정에 개입한 점’은 인정했다. e삼성 의혹에선 구조본의 행보가 기소 사유로 불충분했다 하더라도 에버랜드 사건 재판과정 내내 전환사채 발행과정에서의 구조본 개입 여부가 주목받은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총수 일가 보유 주식과 관련해 구조본 개입 여부를 면밀히 들여다본 특검의 조사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셈이다.
지난 3월 11일 특검팀이 삼성 전·현직 임원들 명의의 삼성생명 주식이 차명이라는 제보를 토대로 삼성생명 본사를 압수수색한 점 역시 특검 수사의 창끝이 최종적으로 어디로 향할지 함부로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동안 시민단체들은 전·현직 임원들이 삼성생명 지분 16.2%를 이건희 회장 일가를 대신해 차명 소유해왔다고 주장해왔다.
삼성생명은 삼성그룹 순환출자구조의 핵심을 이루는 곳으로 삼성생명 지분율 추이에 따라 이 회장 일가의 그룹 장악력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만약 16.2% 지분이 차명으로 인정돼 이에 해당하는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 회장과 계열사들이 보유한 삼성생명 지분율이 30%에 육박해 당장 경영권을 유지하는 데 큰 차질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삼성과 그다지 관계가 편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온 이 회장 여동생 이명희 회장의 신세계가 삼성생명 지분 13.57%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삼성 측 최대주주인 삼성에버랜드의 지분율 13.34%보다도 높다. 삼성생명 차명주식 의혹 조사 결과에 따라 이 회장의 그룹 장악력에 ‘외풍’이 불어닥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검팀의 수사가 미적지근하게 마무리될 경우 검찰 재수사 요구가 불거질 수도 있다. 일각에선 검찰이 삼성 수사 자료 전량을 특검팀에 넘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삼성의 목을 옥죌 만한 정황이 있지만 삼성의 검찰·법조계 로비 의혹이 있어 그냥 손에 꼭 쥐고만 있었을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언제고 터질 뇌관이 검찰 자료실에 보관돼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특검 수사 결과가 우호적으로 나온다 해도 갈 길은 먼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