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증권사들의 ‘인력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증권맨들의 몸값이 치솟고 있다. 사진은 여의도 증권가 전경을 재구성한 것.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사무실 이전보다 요즘 여의도 사람들의 더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이슈는 ‘인력 이동’이다. 여의도 증권사들의 인력 쟁탈전이 불꽃을 튀기고 있는 것. 증권사들의 인수합병과 신규 설립이 붐을 이루면서 인력 기근 현상이 나타난 데다 때마침 연봉협상 시즌까지 겹쳤다. 리서치센터장급의 대어는 물론이고 여직원 빼가기까지 벌어지는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여느 때보다 뜨거운 여의도 증권가의 ‘스토브리그’ 진풍경을 취재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2월 말까지 접수된 증권사 신규설립 신청은 총 13건에 이른다. 이들이 모두 설립허가를 받게 될지는 미지수지만 허가를 받게 되는 회사들은 어떤 형태로든 경력자를 스카우트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여기에 인수합병을 통해 새 출발한 증권사, 투자은행(IB) 부문 강화 등으로 덩치를 키우려는 기존 증권사들의 인력수요까지 한꺼번에 몰리면서 요즘 여의도에서는 말 그대로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스토브리그’의 불을 당긴 주인공은 현대·기아차그룹 계열사로 다시 태어난 ‘현대차IB 증권’(옛 신흥증권). 이 회사는 신임 리서치센터장으로 이종우 교보증권 리서치센터장 영입을 확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대차IB증권은 이 외에도 이옥성 전 한화증권 법인영업 담당 전무를 IB담당 부사장으로, 김혁 굿모닝신한증권 부장을 인사담당 이사로 스카우트하는 등 증권가 고급 인력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한 대형 증권사 직원은 “현대차IB증권 측에서 우리 직원들에 대한 개인적인 영입시도는 물론 심지어 IB팀을 통째로 오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터라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지는 않지만 현대차IB증권이 정상 궤도에 오르면 증권사 인력 블랙홀이 될 것”이라고 털어놨다. 현대차그룹의 한 관계자도 “현대차IB증권이 워낙 인력이 적어 전 증권사를 상대로 영입작업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교보증권의 경우 IB투자본부장을 지낸 임홍재 전무도 최근 기업은행 계열의 IBK투자증권 부사장급으로 영입됐다. 이 때문에 한꺼번에 두 명의 수장급 인력을 잃어 추가 인력이탈을 막기 위해 부심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미 리서치본부와 IB본부의 ‘대표 선수’들이 다른 증권사로부터 잇단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밖에 삼성증권과 동양종금증권은 각각 메릴린치 출신인 권경혁 전무와 씨티은행 출신인 노동래 이사를 리스크관리 책임자로 영입했다.
대규모 인력 수급이 절실한 신설 증권사들은 아예 최고경영자(CEO)부터 외부 수혈로 채우며 증권가의 ‘진공청소기’로 등장하고 있다. KTB네트워크가 설립한 KTB투자증권의 대표이사에는 이병호 전 동양종금증권 부사장이 영입됐으며 솔로몬저축은행이 설립한 솔로몬투자증권의 수장에는 정종열 전 동부증권 사장이 선임됐다.
특히 정종열 사장의 경우 지난 3월 초 솔로몬투자증권의 출범과 동시에 “시장 내에서 영향력 있는 리서치센터장을 영입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여기에 다른 회사의 연구원 영입에도 나설 계획이어서 리서치센터 간의 인력 뺏기는 점점 열기를 더해갈 전망이다.
국민은행 계열로 재탄생한 KB투자증권(옛 한누리투자증권)은 증권가의 스카우트 전쟁에서 다크호스로 급부상하는 케이스다. 우선 CEO 자리에 김명한 전 도이치방크그룹 한국대표를 영입했고 국민은행의 위상에 걸맞은 대형 증권사로 발돋움하기 위해 공격적인 스카우트 행보를 천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미 KB투자증권은 다른 증권사의 스타급 인력들과 물밑 접촉을 시작한 것으로 업계는 파악하고 있다. 특히 KB투자증권은 IB로의 변신을 표방한 국민은행의 방침에 따라 다양한 파생상품을 다룰 수 있는 새로운 분야의 전문가들을 찾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KB투자증권 관계자는 “기존의 중소형 증권사가 신입사원을 채용해 메이저 증권사로 거듭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당연히 관련 업계의 경력직 사원을 채용함으로써 경쟁력을 키워나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CEO와 리서치센터장, 파생상품전문가 등의 고급 인력 쟁탈전은 그나마 양반에 속한다. 전산인력과 홍보인력, 심지어는 여직원들까지 구인난이 생길 정도로 분야에 관계없이 인력 빼가기 전쟁이 진행 중이다. 이 때문에 요즘 여의도에서는 “증권사 직원이면 수위 아저씨도 스카우트 대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 ‘증권사 명함이 곧 유가증권’인 셈이다.
특히 최대한 많은 고객을 끌어 모아야 하는 증권사의 ‘얼굴’, 홍보 분야는 인력 대이동이 예고된 분야다. 신설 증권사가 늘어나면서 기존 증권사 홍보 인력이 대거 이동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데다 기존 증권사들 역시 신생 증권사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홍보인력 보충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누리증권 시절에는 별도의 홍보팀이 없던 KB투자증권의 경우 홍보팀을 신설한다는 계획을 확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증권가의 예민한 특성을 다룰 줄 아는 홍보맨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기존 증권사의 인력 스카우트는 불을 보듯 뻔하다는 시선이다.
증권가에서는 일단 인력 이동이 시작되면 도미노 현상처럼 대규모 이동으로 이어져 이번 ‘인력 파동’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지난해 김영익 하나대투증권 부사장이 대신증권을 떠나는 것과 동시에 몇몇 증권사의 리서치센터장들이 줄줄이 자리를 옮기며 인력 대이동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증권맨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등의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코스피 지수가 1700포인트를 탈환하긴 했지만 아직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증시와는 동떨어진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스카우트 대상으로 거론되는 리서치센터장들이 5억 원이 넘는 연봉을 요구하고 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그는 또 “여의도에서 이름깨나 있다는 웬만한 증권맨들은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때 기본으로 3억을 부르는 게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업계 일각에서는 증권가의 잦은 스카우트와 그로 인한 과도한 연봉 등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한 증권사 고위 관계자는 “인력을 키울 생각은 않고 곶감 빼먹기 식의 인력 빼앗기에 열중하다가는 결국 업계의 공멸을 부를 것”이라며 “시간과 자본을 투자해 인력을 키우고 이들을 통해 다시 후진을 양성하는 선순환 시스템이 정착돼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