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이 삼성특검에 출두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 회장을 비롯한 주요 경영진이 불구속 기소돼 한동안 법정에 들락거리느라 해외 일정 등에 차질이 있겠지만 특검이 의혹의 상당 부분에 대해 무혐의 판정을 내린 점은 분명 삼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하는 대목일 것이다. 일단 ‘삼성이 잘 막아냈다’는 평가 속에 삼성 사태는 기소된 인사들이 곧 서게 될 법정에서 2라운드를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특검팀은 수사 과정에서 구조조정본부(구조본·현 전략기획실)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과정에 대해 이건희 회장에게 보고했다는 정황을 얻어냈지만 이 회장의 직접 지시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재판 과정에서 이 회장이 에버랜드 사건을 주도했다는 정황이 드러날 경우 죗값이 무거워질 것임은 당연한 일. 구조본이 이 회장의 직접 지시 없이 ‘선 시행 후 보고’를 할 수 있는 자율적인 조직인가를 재판부가 따지고 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삼성 측에선 간절할 듯하다.
이 회장과 삼성이 얼마나 ‘법원의 입맛’에 맞게 대응하느냐도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보복폭행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1심 재판에서 ‘집행유예가 내려질 것’이란 예상을 깨고 법정 구속된 이유가 재판부에 대한 ‘불경죄’였다는 이야기는 이제 재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 관련 재판이 이 회장 재판에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최근 대법원은 정 회장이 현대차 비자금 사건 항소심에서 받은 집행유예와 사회봉사명령 판결을 파기했다. 자칫 수위가 올라가 실형이 선고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렇다 보니 1128억 원 양도세 포탈에도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은 이 회장과 자연스레 비교된다. 정 회장은 이미 지난 2006년 4월 구속수감돼 두 달간 구치소 생활을 한 반면 당시 에버랜드 사건 수사 중이던 검찰은 이 회장을 소환조차 하지 않아 형평성 논란에 불을 지핀 바 있다. 이번 특검 수사 발표에서 조준웅 특검이 불구속 사유 중 하나로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거론하자 재계 인사들 사이에선 이 회장과 정 회장에게 적용되는 다른 잣대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 회장의 아들 이재용 전무는 부실경영 책임을 다른 계열사들에 떠넘겼다는 이른바 ‘e삼성 사건’과 관련, 특검의 불기소 처분을 받아 이번 특검 수사의 최대 수혜자라는 평까지 듣는다. 이 전무를 둘러싼 각종 의혹이 특검 수사를 통해 무혐의 처분을 받으면서 주당 7700원으로 사들인 에버랜드 지분을 통해 큰 탈 없이 그룹 경영권을 승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 조준웅 특별검사가 17일 한남동 삼성특검 기자실에서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 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반면 향후 삼성 재판이 특검 수사 결과물 이상의 것을 파헤칠 수 있겠느냐는 자조 섞인 분석도 나온다. 삼성 특검법에 따라 이번 재판은 1심 3개월, 2심 2개월, 3심 2개월 내로 이뤄지게 된다. 조준웅 특검이 수사발표에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한 데다 새 정부에 대한 ‘경제적’ 기대심리가 어우러져 재판기간이 7개월까지 가지 않고 조기에 마무리될 가능성도 일각에선 거론된다.
삼성그룹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제기한 삼성의 정·관계 로비 의혹을 특검이 무혐의 처리하면서 로비 담당과 대상으로 지목된 인사들의 역공이 가능해진 것도 관전 포인트다. 김 변호사가 로비 실무자로 거론한 이우희 전 에스원 사장과 제진훈 제일모직 사장은 이미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검에 김 변호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만약 삼성 측이 이번 특검의 직접적 원인이 된 김 변호사를 상대로 강력한 법적 대응에 나설 경우 특검 면죄부 논란이 채 식지 않은 상태에서 ‘반 삼성’ 정서를 부추길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지적이다.
몇몇 수사당국 관계자들은 “특검팀이 김 변호사의 로비 폭로를 모두 무혐의로 결론 낸 상태에서 삼성이 행동에 나서지 않을 경우 재판과정에서 자칫 삼성이 뭔가 켕긴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성이 김 변호사를 몰아붙이게 될 경우 파생될 반 삼성 정서와 김 변호사의 대응 수위 또한 삼성으로서는 고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지난주 <일요신문> 832호가 단독 보도한 ‘김용철 변호사 삼성 다큐멘터리 찍는 내막’ 제하의 기사처럼 김 변호사가 ‘반 삼성’ 홍보활동을 계속 펼쳐나간다면 이 회장 등 인사들의 법정에 가는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 수도 있다.
이 회장 등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특검팀이 미흡하게 다룬 것으로 평가받는 사안들이 재조명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삼성 사태를 지켜봐온 다수 재계 인사들은 이용철 전 청와대 비서관이 삼성으로부터 뭉칫돈을 전달받았다고 밝힌 내용에 특검이 주목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다. 지난해 10월 김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발언 직후 터져 나온 이 전 비서관의 삼성 로비 주장은 삼성 수사 열기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전 비서관이 “필요하면 수사당국 조사를 받겠다”고 밝혔음에도 특검은 이 건에 대해 수사를 벌이지 않았다. 이 전 비서관 폭로 이후 삼성의 청와대 인사들에 대한 로비 의혹이 정·관·재계 인사들 사이에 강하게 불거졌던 점을 보면 특검이 애써 주목하지 않은 인사들 중에 삼성 로비 의혹을 부추길 만한 ‘법정 참고인’이 탄생할 수도 있는 셈이다.
특검이 기소하지 않은 사안을 법원이 깊이 파헤칠 개연성은 떨어지지만 예상치 못한 돌출 발언이나 정황이 공개될 경우 이 회장과 삼성이 법정재판보다 더 혹독한 여론재판을 받게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