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X가 유상증자를 발표한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STX 강덕수 회장(왼쪽)과 본사 건물. | ||
STX는 지난 6월 16일 3000억 원가량의 유상증자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에 증권가의 주요 애널리스트들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라고 입을 모았다. 일전에 STX가 증권사 리서치센터장과 애널리스트들을 대상으로 한 비공개 회의에서 ‘유상증자를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덕수 회장을 비롯한 STX 고위 임원들도 여러 차례 “추가적인 유상증자나 차입은 없을 것”이라고 천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대규모의 유상증자가 이뤄진 것이다.
STX는 유상증자와 관련한 ‘말 바꾸기’에 대해 “당시만 해도 유상증자에 대해 확정된 바가 없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주식시장에서 STX를 바라보는 눈은 차갑다. 증권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유상증자와 관련해 말을 바꾸는 사례들은 많다. 하지만 그것이 대기업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만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에서 한 번 신뢰를 잃으면 회복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커진 덩치에 걸맞은 역할을 했을 때 진정한 대기업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STX를 향한 비난의 화살은 주가에도 반영됐다. 8만 원을 넘나들던 STX 주가는 유상증자 발표 이후 4만 9400원(7월 2일 종가 기준)으로 추락했다. 계열사들 주가도 맥을 못 추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STX엔진의 경우 5만 원대에서 3만 원대 초반으로 떨어졌고 STX팬오션도 연일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조선업 호황기에 힘입어 좋은 실적을 올리고 있는 STX조선조차도 유상증자 전 3만 원대 중반에서 7월 2일 종가 기준으로 2만 6750원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STX뿐 아니라 다른 계열사에 대한 유상증자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될 수 있을 듯하다. STX에서는 “다른 계열사에 대한 추가 유상증자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미 한 번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이것이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STX의 유상증자 발표 이후 재계의 관심은 3000억 원이 넘는 자금의 사용처로 모아졌다. 처음엔 구체적인 용도를 밝히지 않았던 STX도 유상증자 배경에 대해 해석이 분분하자 ‘재무건전성을 높이고 해외투자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는 공식입장을 내놨다. STX 관계자는 “금액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만기가 돌아오는 차입금 상환과 중국 등 해외 자원개발에 들어가는 비용으로 충당하면 3000억 원가량이 딱 맞아 떨어진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STX의 이러한 설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우선 STX는 지난해 당기순이익 4600억 원가량을 올렸는데 이는 전년도에 비해 네 배 이상 많아진 금액이다. 또한 올해 상반기 실적도 나쁘지 않아 상당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굳이 유상증자를 통하지 않더라도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STX의 유상증자 발표 이후 증권가에서는 “STX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 자금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 아니냐”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최근 STX는 유럽 최대 크루즈선 조선소인 아커야즈를 인수했고 중국 대련 지방에는 조선해양 종합생산기지를 건설하는 등 막대한 자금을 글로벌 사업에 쏟아 붓고 있다. 이에 대해 STX 측은 “그룹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자금이 풍부하다. 다만 그룹 지주회사 격인 STX에 자금 소요가 커서 (유상증자를) 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STX의 유상증자를 대우조선해양 인수전과 연관 지어 보기도 한다. STX는 유상증자를 발표한 지 이틀 뒤인 6월 18일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고 공시했다. 회사 측에서는 “아직 결론 난 사항은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동안 M&A로 톡톡히 재미를 본 STX가 어떤 형태로든 올해 M&A 최대어 중 하나로 꼽히는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 참여할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계열사들이 추가적으로 유상증자를 실시할 것이란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현재 대우조선해양 인수가격은 7조~10조 원 사이에서 결정될 전망인데 이번에 STX가 유상증자를 통해 모은 3000억 원가량의 돈은 인수전 참여를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추가적인 실탄 확보 작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최근에 정부가 물가안정을 위한 긴축재정의 일환으로 대기업의 과도한 M&A대출을 억제하기로 함에 따라 STX가 계열사 유상증자와 같은 자체적인 자금모집 방안을 마련할 가능성은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 STX는 이에 대해 “설령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이번에 모은 자금을 활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부인했다.
이번 유상증자를 STX의 지주사 전환과 증권업 진출을 위한 장기적인 포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STX는 STX조선 35.72%, STX엔진 26.58%, STX에너지 47.49% 등 주요 계열사 최대주주에 올라 있는 사실상의 그룹 지주회사다. 강 회장은 STX 최대주주(지분 12.11%)로서 이를 통해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STX의 지난해 말 부채비율은 222%에 이른다. 지주사 전환을 위해서는 부채비율이 200% 이하여야 하는데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0%가 넘는 부채비율은 STX의 증권업 진출에도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 비금융사가 증권사의 최대주주가 되려면 지주회사 전환과 마찬가지로 부채비율이 200% 이하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STX는 그룹 계열사인 STX팬오션이 올해 초 증권사 설립을 선언했지만 금융위원회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해 애만 태우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까지는 STX팬오션이 증권사 설립의 주체이긴 하지만 STX팬오션의 대주주인 STX조선이 과거에 증권거래법을 위반한 적이 있어 허가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 때문에 지주사 격인 STX가 직접 증권업 진출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유상증자로 인해 자금이 유입되면 STX의 부채비율은 200% 이하로 낮아질 전망이다. 지주사 전환이나 증권업 진출을 가로막았던 장벽이 사라지게 되는 것. STX에서는 이러한 사안들에 대해 “부채비율이 낮아지는 것은 맞다. 하지만 굳이 지주사 등을 염두에 두고 (유상증자를) 한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