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드라마 <쩐의 전쟁>의 한 장면. 폭력과 불법이 난무하는 드라마 속 사채시장과 현실은 거리가 있다. | ||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하고 사람들은 드라마를 통해 현실을 본다. 명동 사금융 시장이나 업자를 보는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사채업자 하면 ‘금나라’를 떠올린다. 꼭 1년 전 이맘때 히트를 친 TV 드라마 <쩐의 전쟁>의 영향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많은 국민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인기를 얻으면서 ‘보너스라운드’라는 이름으로 추가 제작되었고 케이블 방송에서도 이를 다시 제작해 방영하는 등 화제가 됐다. 얼마 전엔 이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가 출연료를 받지 못했다고 하여 제작사를 상대로 출연료 소송을 제기하자 언론에서는 ‘실제 상황 쩐의 전쟁’이라 다루기도 했다.
각종 금전문제의 갈등이 생기면 언론에 등장하는 헤드라인이 ‘쩐의 전쟁’이 됐을 정도로 이 드라마의 여파는 컸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이나 드라마 내용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사채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인지 궁금해 하면서 거의 모든 매체에서 사채시장에 대해서 조명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는 드라마에 나온 불법 사례를 예로 들어가며 국민에게 대부업 관련 정보를 제공할 정도였고 드라마 인기 여파로 이자제한법과 대부업의 금리상한선이 강화되는 법률 개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과연 드라마에서 벌어진 각종 극적 사건들이 실제로도 존재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 내용에 나오는 상황을 현실과 비교해보면 이렇다. 드라마에서 사채업자들에게 당한 주인공 금나라(박신양 분)는 전설적인 사채업자 독고철(신구 분)의 수제자가 되고 마동포(이원종 분) 밑에 가서 일을 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사채업자가 수제자를 거느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제자’란 스승이 알고 있는 노하우를 물려받는 학생인데 이 시장에서는 노하우의 전수 자체가 불가능하다. 업무처리 상황을 옆에서 보면서 직접 터득해야 하는 것이지 누가 붙잡고 하나하나 가르쳐 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드라마에 사채업자가 채무자에게 심한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상황은 90년대 이전에나 가능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채권회수에 문제가 생기면 소위 ‘주먹’들을 투입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가혹한 방법이 동원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얻어맞아가며 숨죽이고 있을 채무자도 별로 없으며 채권자들도 자신들의 채권회수에 문제가 생길 만한 채권추심에는 매우 민감하다.
지난 2002년 8월 ‘대부업의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대부업법)이 제정되면서 업계 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불법추심, 법정이자 초과에 대한 정부기관의 정기적 단속이 부쩍 강화됐다. 불법사채업자에 대해서는 ‘민생침해사범’으로 규정해 엄하게 처벌하고 있다.
드라마 속에서는 사채업자와 전주들이 파티를 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것이 아예 가능하지 않다고 할 순 없으나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많은 인원이 모이는 일은 없다. 아주 친하게 지내는 사이의 소수 인원이나 다른 공식적인 모임을 통해서 만나는 경우는 있지만 ‘그들만의 파티’는 실제로 존재하기가 쉽지 않다. 동종업계의 동업자라고는 하나 항상 경쟁관계이며 금전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상황이라서 마음을 드러내놓고 대화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드라마에서는 다른 대형 대부업체를 인수하는 상황이나 마동포가 거액의 현금을 사무실 지하공간에 보관하는 장면 등을 볼 수 있다. 이런 것들도 역시 ‘픽션’이라고 이해하고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다. 대형 대부업체를 새로 인수하는 것보다는 직접 설립하는 편이 현실적이다. 법이 강화된 이후에 많은 명동시장 사람들도 법에 저촉이 되지 않도록 업체를 등록하고 직접 업무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업체를 인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거액의 현금 보관도 그렇다. 자신의 개인 소유 주택에 별도로 특별한 장치로 두어서 금고를 만든다면 모를까, 마동포처럼 ‘무식한 방법’으로는 현금을 보관하지 않는다. 현실 속의 업자들은 각종 예금이나 채권, MMF(Money Market Funds·일종의 단기금융상품) 등 현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을 이용한다.
이렇듯 드라마와 현실 사이엔 거리가 있지만 드라마보다 더한 현실도 있는 법. 몇 년 전 마동포 같은 방법으로 비자금을 보관하다가 처벌받은 기업인이 생각난다. 자신의 부친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아무도 모르게 어음을 과다 발행하는 수법으로 비자금을 만들어서 빌라의 방 안에 현금을 침대같이 쌓아두었다가 검찰에 적발되면서 언론에 ‘돈 침대’라는 제목으로 공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러한 불법적인 자금을 앞서 얘기한 ‘전설’ 속 재벌2세처럼 어리숙한 방법으로 처리하러 달려든다면 드라마처럼 당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치호 ㈜중앙인터빌 상무 one1019@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