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정은 현대 회장(왼쪽)과 정몽구 현대차 회장. | ||
최근 현대그룹의 지배구조 강화 작업의 신호탄은 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가 쏘아 올렸다. 지난 8월 13일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상선 주식을 추가 매수하기로 한 것. 총 220억 원 규모다. 당시 현대상선 주가 4만 원 기준으로 약 55만 주를 사들이면 현대엘리베이터의 현대상선 지분율은 18.89%에서 19.25%로 올라간다.
8월 27일엔 현정은 회장의 외아들 정영선 씨(23)가 그룹 계열사의 주요주주로 이름을 올렸다. 현대택배로부터 현대그룹의 투자자문사인 현대투자네트워크 지분 20%(4만 주)를 넘겨받은 것. 이로써 영선 씨는 누나 지이 씨가 전무로 있는 현대U&I(지분율 50%)에 이어 2대주주가 됐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투자네트워크는 자본금 10억 원짜리 작은 계열사다. 영선 씨가 ‘데뷔했다는 의미’ 외엔 아무 것도 없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현대투자네트워크는 그룹의 사활이 걸린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핵심 역할을 할 것으로 평가돼 왔다. 만약 현대건설 인수에 성공한다면 정영선 씨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많은 재벌가들의 사례처럼 현대투자네트워크가 그룹의 지원을 받아 몸집을 불린 후 ‘상장 대박’을 터뜨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2일 현대증권 이사회는 현정은 회장의 등기이사(비상근) 선임과 340만 주에 이르는 자사주 매입을 의결했다. 그동안 현정은 회장은 현대증권 고문으로 있으면서 월 3000만 원의 고문료를 받아와 전국민주금융노동조합 현대증권지부(노조·위원장 민경윤)로부터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최근 이 소송은 1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이 났고 노조는 항소했다. 현 회장은 등기이사로 선임되면서 이사회 의장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2006년부터 현대증권을 이끌었던 김중웅 회장은 2선 후퇴할 가능성이 커졌다.
현대증권의 자사주 매입은 3년여 만의 일. 이로써 현대증권에 대한 현대그룹 우호지분은 2%가량 늘어난다. 지난 7월 현대상선이 현대증권 주식 510만 주(3%)를 추가 매입한 부분을 합치면 현대그룹 우호지분은 다소 불안한 20%대 후반에서 32%로 올라선다. 현대증권은 그동안 그룹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매각설에 시달려왔다. 특히 현대건설 인수를 위한 실탄 마련용으로 매각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 두 가지 조치로 매각설 불식은 물론 현 회장은 실질적이며 직접적인 지배력을 확보하게 된다. 현 회장은 증권사 경영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으며 그 첫 작품으로 ‘여성 전용 점포’ 오픈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지난 6월부터 증권가에는 현대엘리베이터 최대주주였던 현정은 회장 모친인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80)의 건강이상설과 함께 김 이사장 보유 지분 변동설이 떠돌았다. 그리고 지난 4일부터 김 이사장이 보유 중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이동이 시작됐다. 우선 32만 주(4.48%)를 공익법인인 재단법인 영문에 증여, 영문재단은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율을 4.99%까지 늘렸다. 영문재단은 증여세가 면제되는 주식 출연·취득 한도 5%를 다 채우면서 현대그룹 지배구조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김 이사장이 평소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아 증여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없다”고 밝혔다.
10일에는 현대택배와 현대U&I가 김문희 이사장의 엘리베이터 지분 각각 4.14%(29만 5000주), 0.91%(6만 5000주)를 주당 8만 2000원(총 295억 2000만 원)에 매입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현대엘리베이터의 최대주주였던 김 이사장의 지분율은 19.36%에서 9.83%로 뚝 떨어졌고 지분 16.41%를 확보한 현대택배가 최대주주로 등극, 현대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으로 떠올랐다. 이제 그룹의 지배구조는 ‘현정은 회장→현대택배→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현대택배(현대증권·현대아산)’의 모양새를 띠게 됐다.
<일요신문>은 이미 지난해 8월(795호) ‘현대그룹 건설포기설 내막’ 제하의 기사에서 현대택배 중심의 그룹 지배구조 개편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이제 관심은 현대택배와 그룹 지배구조의 핵인 현대상선에 대한 현정은 회장의 지배력 강화 ‘로드맵’으로 모아진다.
이에 대해 증권가에서는 비상장인 현대택배가 유상증자 등을 통해 현 회장 지배력(현재 개인 지분율 12.61%)을 더욱 높이고 상장, 현대건설 M&A나 계열사 지분 매입을 위한 실탄 마련에 나설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이번 김문희 이사장의 보유지분 매각대금과 나머지 보유지분도 현대상선 등의 지배력 강화에 쓸 가능성이 크다고 관측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에 대해 현대그룹 측의 말을 종합하면 “경영권 강화를 위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동안 줄기차게 “경영권엔 문제없다”라고 말해온 것과 달라진 분위기다.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재계에서는 현대상선 우호지분의 ‘한계’와 현대건설 인수전 관련 ‘이상기류’, 두 부분에 주목한다.
현재 현대그룹 측이 밝히는 현대상선 우호지분은 48%가량. 이 가운데 케이프포춘(7.06%)과 넥스젠캐피탈(3.53%), 은행권의 상환우선주(6.69%)의 의결권 계약기간과 상환만기는 2011년 전후 돌아온다. 앞으로 3년,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 차근차근 지배구조를 강화해 나가야 하는데 지금의 행보는 그 일환이라는 시각이다. 게다가 관련 주가가 약세를 보이고 있는 지금이 적은 돈으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이다.
현대상선의 우호지분 문제는 다시 현대건설 인수전과 연결된다. 현대상선 지분 8.3%를 쥔 현대건설을 인수한다면 우호지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경영권은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다. 일단 현대그룹 측에서 가장 경계했던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은 현대건설 인수전 불참을 선언했다. 잠재적 경쟁자였던 두산그룹도 손을 들었다. 현대그룹으로선 최상의 구도다.
그런데 최근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현대가 장자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이 심상찮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것. 구체적으로 ‘현대건설 인수 TF팀’까지 꾸렸다는 말도 있다.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현대차그룹은 현대그룹 측이 ‘만약’의 단서를 달면서 “가장 버거운 상대”라고 실토할 만큼 인수전의 중대 변수. 게다가 현대차그룹이 중심이 돼 현대건설을 가져간다면 ‘범현대가’의 현대상선 지분율은 40%를 넘기며 현 회장의 경영권을 위협하게 된다.
최근 지배구조 강화 작업은 현대그룹이 현대차그룹의 현대건설 인수전 참여 움직임을 감지하고 현대건설 인수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고 있다는 게 재계 일각의 관측이다. 현대건설 인수전에 대해 현대차 측은 “사실무근, 관심 없다”는 입장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건설 몸값을 띄우려는 세력 쪽에서 루머를 퍼뜨리는 것 같다”고 밝혔다. 어쨌거나 현대그룹 입장에선 ‘유비무환’이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