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황선홍 감독(왼쪽)과 수원 서정원 감독이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이들은 1992년 프로에 데뷔했다. 연합뉴스
# 1992년 ‘시작’
유난히 굵직한 스타플레이어들이 등장한 시기가 바로 1992년이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홍명보 전 올림픽대표팀 감독(44)이다. 작년 여름 홍명보는 한국 축구에 엄청난 위업을 달성했다. 2012 런던올림픽 남자 축구 종목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것. 그것도 ‘축구 종가’ 영국 땅에서 ‘영원한 라이벌’ 일본을 꺾고 울린 승전고였다.
올림픽이 끝난 뒤 홍명보는 “내게는 10년을 주기로 큰일이 벌어진다. 1992년이 그랬고, 2002년(한일월드컵 4강 신화 달성)이 또 그랬다. 2012년에도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말이다”라고 했다.
홍명보가 언급한 1992년은 바로 프로 데뷔였다. 포항제철 아톰즈(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면서 자신의 화려한 커리어의 첫걸음을 뗐다. 그리고 데뷔 첫해에 그는 프로축구 최우수선수(MVP)에 올랐다. 물론 이전부터 홍명보는 국내 최고의 스타였다. 대학생 신분으로 1990이탈리아월드컵에 출전하면서 최고의 스타 탄생을 알렸다.
홍명보 올림픽대표팀 감독
그러나 홍명보만 탄생한 건 아니었다. K리그 클래식(1부 리그) 최고 명문 클럽으로 통하는 수원 삼성의 서정원 감독(43)도 홍명보와 나란히 프로축구에 등장했다. 행선지는 안양 LG 치타스(현 FC서울)였다. 나름 인상적인 활약이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출전하면서 1992년을 밝혔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홍명보, 서정원이 한때 한 배를 탔었다는 점. 올림픽호 출범 초기, 둘은 각각 감독-코치 신분으로 한솥밥을 먹었으나 서 감독이 2010년 조광래 전 성인 국가대표팀 감독의 부름을 받으면서 끝까지 함께하진 못했다.
“내 인생이 바뀐 순간이 바로 1992년이다. 지금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이지만 예전 K리그 수준도 상당히 높았다. 꿈이 이뤄진 시간이었다.”
서정원과 동갑내기로 1992년 프로축구를 뜨겁게 만든 이로 신태용 전 성남 일화 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스페인에서 축구 연수를 하고 있는 신태용은 1992년 일화 천마 축구단에 데뷔해 2004년 현역 생활을 마칠 때까지 ‘원 클럽 맨’으로 레전드 반열에 올랐다. 프로 사령탑에 첫발을 디딘 곳 역시 성남 일화였으니 그야말로 진정한 ‘의리의 남자’였던 셈이다. 당시 신태용은 23경기에 나서 9골 5도움을 기록, 평생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다는 프로축구 신인상을 수상해 MVP 홍명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앞선 세 명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부산 아이파크 사령탑을 거쳐 친정팀 포항 지휘봉을 잡은 황선홍 감독(45)의 프로 데뷔 시점도 사실은 1992년이었다. 물론 1991년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엘 레버쿠젠에서 본격적인 축구 인생을 시작한 것으로 돼 있으나 아마추어 신분이 아닌, 진짜 프로 선수로는 부퍼탈SV 소속으로 뛴 1992년이었다. 한국 복귀는 1993년 포철에 입단하면서부터.
2012런던올림픽 남자축구 3·4위전에서 한국이 일본에 승리를 거두자 홍명보 감독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2년 프로 데뷔파 가운데 여전히 왕성한 활약을 펼치는 선수가 있다. 전남 드래곤즈의 주전 수문장 김병지(43)다. 1992년 현대 호랑이(현 울산 현대)에 입단한 그는 포항-서울-경남 등을 거쳐 올 시즌을 앞두고 전남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김병지가 그라운드를 밟을 때마다 프로축구에는 새 역사가 펼쳐지고 있다. 벌써 600경기를 뛰었다. 골키퍼란 특수성으로 활동량이 보다 많은 타 포지션에 비해 오래 뛸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 철두철미한 자기 관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공식 프로필상에 나오는 체중 78kg은 21년 전이나 지금도 똑같다.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물론 커피 한 모금을 마시는 일조차 상당히 고민할 정도로 컨디션을 조절한다. 선배들이나 후배들 모두가 “축구 선수들 중 가장 몸 관리를 잘하는 사람”으로 김병지를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전남이 축구 선수로는 불혹을 넘어 황혼기에 접어든 김병지와의 계약기간을 1년도 아닌, 2년으로 했다는 사실만을 봐도 갈채를 보낼 만하다.
김병지는 “1992년 몸 상태와 지금이 큰 차이가 없다. 지금도 가끔 힘들 때면 프로 데뷔한 그 시절을 돌이켜본다. 항상 초심을 유지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 1992년 ‘시작을 위한 끝’
왼쪽부터 최강희 국가대표팀 감독, 박경훈 제주Utd 감독, 최진한 경남FC 감독.
“(은퇴 시기가) 서른네 살이었다. 사실 좀 더 오랫동안 뛸 수도 있었다. 많이 아껴주신 김호 감독님께서도 벤치 멤버도 좋으니 1994미국월드컵에 함께 가자는 말씀까지 하셨지만 결국 조금이라도 아름다울 때 떠나고자 했다.”
이밖에 현직 프로팀 사령탑들 가운데 유독 1992년 현역 은퇴자들이 많은 편이다.
제주를 이끌며 잔잔한 돌풍을 일으키는 박경훈 감독(52)도 1984년부터 함께한 포철을 1992년에 떠났고, 어려운 살림의 도민구단인 경남FC에서 120% 이상 성적을 내고 있는 최진한 감독(52) 역시 1988년부터 시작한 현역 생활을 1992년에 끝냈다. 럭키금성(LG구단의 전신)에서 뛰다 유공에서 유니폼을 벗었다.
대전 시티즌-경남-전남 등지에서 수석코치로 활동하다 여자 국가대표팀을 이끄는 윤덕여 감독(52) 역시 1992년 포철에서 은퇴했다. 윤 감독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솔직히 더 뛰고 싶지 않았다면 나를 속이는 게 아닐까. 미련도 한참 남았었고, 그라운드 잔디 냄새가 그리울 때도 많았다. 그래도 영원토록 축구 선수로 활동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누구나 ‘떠나야 할’ 때가 있는데, 1992년이 바로 그때였다고 생각한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
92년생 스타들은 누구 대세 손흥민 ‘92년둥이’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어린 나이에 독일 분데스리가로 진출해 강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손흥민(함부르크SV)이 1992년생을 대표하는 선수다. 최연소 나이로 2011 카타르 아시안컵 당시 조광래호에 뽑혀 A매치 데뷔 골을 뽑아냈던 그는 대표팀 공식 일정 중 가장 최근이었던 3월 26일 카타르와의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5차전 홈경기(2-1 한국 승)에서도 종료 직전 결승골을 기록, 답답해하던 팬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안겼다. 요즘 손흥민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원 소속 구단인 함부르크가 그를 잔류시키기 위한 많은 노력과는 별개로 바이에른 뮌헨, 도르트문트 등 분데스리가 전통의 명문 클럽들뿐 아니라 ‘대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도 러브콜이 쇄도 중이다. 첼시와 리버풀, 토트넘 훗스퍼 등에 이어 최근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까지 손흥민의 영입전에 뛰어들었다는 현지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작년 말부터 흘러나왔던 다양한 이적설에 대해 손흥민 측은 모든 내용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고 있지만 ‘주가 폭등’ 사실을 확인시키듯 전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축구 전문지로 정평이 난 <월드사커>도 4월호 특집 리포트에 손흥민을 소개했다. 내용인 즉, ‘올여름 유럽 축구 이적시장을 달굴 100명의 선수’였는데, 바로 여기에 손흥민을 언급했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유일한 선수였기에 의미를 더했다. 물론 K리그 클래식에도 주목할 만한 ‘될성부른’ 떡잎들이 많다. 전남 구단의 산하 학교인 광양제철고등학교 출신으로 ‘광양 루니’라는 닉네임을 지닌 스트라이커 이종호와 경남FC에서의 활약을 발판 삼아 ‘디펜딩 챔피언’ 서울에 안착한 윤일록 등이다. 특히 작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이종호는 자신이 태어난 해인 1992년 프로 무대에 들어선 김병지와 나란히 호흡을 맞추고 있어 한국 축구에 각별한 스토리를 입히고 있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