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선으로 물러났다’는 평가를 듣는 이준용 대림그룹 명예회장이 최근 그룹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
지난 10월 15일 증권가는 ‘대림산업 부도설’로 들썩거렸다. 건설업계 5위인 대림산업이 ‘산업은행으로부터 빌린 차입금을 갚지 못해 파산 절차를 밟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문이 전해지자 대림산업을 비롯한 계열사 주가는 연일 하한가를 기록하며 폭락했다. 10월 14일 종가 5만 8900원이던 대림산업 주가는 10월 17일 종가 3만 9050원까지 떨어졌다. 불과 3일 만에 2만 원가량이 내려간 것이다. 부도설은 결국 근거 없는 루머로 밝혀졌지만 대림산업은 주가하락, 대외 이미지 손상 등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대림산업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10월 20일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을 상대로 한 간담회에서 실적 발표를 하며 적극 해명에 나선 것이다. 이날 대림산업은 3분기 매출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4.4% 증가한 1조 5135억 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영업이익은 55.2% 증가한 1616억 원이었다.
또한 당장 만기가 돌아오는 차입금 규모도 1300억 원대로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4000억 원대의 현금에 비하면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라며 시중에 유포되고 있는 유동성 위기는 ‘사실무근’이라고도 했다. 간담회에 참여했던 한 애널리스트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깜짝 실적이었다. 어려운 경기 속에서도 해외 건설 수주가 호황을 보여 우수한 실적을 올린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실적 발표 다음날인 21일, 대림산업은 종로경찰서 사이버수사대에 ‘루머의 진원지를 찾아달라’며 수사를 의뢰했다. 그동안 많은 기업들이 악성 루머로 속을 앓아왔지만 이처럼 정식으로 수사를 의뢰하는 것은 드문 경우인지라 재계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대림그룹 관계자는 “멀쩡한 회사를 고의적으로 흠집 내는 세력을 찾아야 한다. 우리뿐 아니라 많은 기업들이 피해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며 고소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현재 경찰은 수사에 애를 먹고 있다는 전언이다. 종로경찰서 측은 “루머가 유포된 것으로 보이는 메신저의 관리 회사를 조사하고는 있지만 서버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난항을 겪고 있다”고 털어놨다.
대림산업의 실적발표, 수사의뢰 이후 시중에 나돌던 부도설과 유동성 위기설 등은 수그러들었다. 재계와 증권가에서는 “대림산업의 신속하고 강력한 대응이 루머를 잠재웠다”고 평가했다. 이런 와중에 재계 일각에서는 ‘역시 이준용’이라는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이 명예회장이 이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했다는 설명과 함께.
대림그룹 사정에 밝은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 명예회장이 직접 대책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안다. 경찰 수사 의뢰는 이 명예회장 작품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대림그룹 관계자는 “회장님 일은 잘 알지 못한다”며 즉답을 피했다.
이 명예회장이 ‘소방수’로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여천NCC에 공동 투자한 한화그룹과 분쟁이 생기자 사태 해결을 위해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이 명예회장은 직접 김승연 한화 회장을 고소하는 등 강력 대응책을 들고 나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최근 들어 대림그룹은 악성 루머 이외에도 여러 구설들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지난 9월에는 안양 비산동 대림아파트 사기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주택조합장인 김 아무개 씨가 조합분은 물론 일반분까지 이중분양을 해주며 거액을 챙긴 것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만 136명, 피해액은 36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대림산업은 “우리도 조합장에게 속은 피해자”라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지만 아파트업계 최고 브랜드인 ‘대림’을 믿은 피해자들의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실제로 지금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대림산업 측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안양경찰서가 대림산업 관계자들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그 결과에 따라 대림산업에도 불똥이 튈 전망이다.
10월 초에는 ‘편법 합병 의혹’을 받기도 했다. 당시 대림그룹이 대림코퍼레이션과 대림H&L의 합병을 발표하자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이 명예회장의 장남인 이해욱 대림산업 부사장의 경영권 승계를 원활히 하기 위한 ‘꼼수’라고 지적했다. 대림그룹은 ‘대림코퍼레이션→대림산업→각 계열사’로 이어지는 출자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림H&L 지분 100%를 가지고 있는 이 부사장이 합병으로 그룹 지주사 격인 대림코퍼레이션 지분을 확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6일 대림코퍼레이션이 공시한 ‘최대주주의 주식보유 변동’에 따르면 이 부사장은 32.12%의 지분을 보유하며 60.96%를 보유한 이 명예회장에 이어 2대주주에 올랐다. 이로써 이 부사장은 경영권 승계로 가는 탄탄대로에 들어섰다. 물론 ‘편법 합병’이라는 꼬리표는 쉽게 떼어내기 힘들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룹 내에서조차 잇따른 투자 실패를 기록한 이 부사장에 대한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국 이 명예회장의 ‘롤백’은 그룹이 당면한 위기 돌파와 함께 후계구도 안정화를 꾀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이 명예회장이 아직 아들의 경영 수완에 대해 ‘미심쩍어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도 나오고 있다. 앞서 언급한 재계 관계자는 “이 명예회장이 그룹에 닥친 난관을 극복하는 것과 동시에 아들 위에 드리워져 있는 먹구름을 걷어 치워주려고 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또 “이 명예회장이 최근 그룹 임원들의 군기잡기에 나섰다는 소식인데 이것 역시 ‘차기’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본다”고 보탰다.
몇몇 대림그룹 내부인사들에 따르면 이 명예회장은 얼마 전부터 임직원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활용하며 내부 단속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후문이다. 계열사 사장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는 위기 대처 미흡과 정보 유출 등을 거론하며 호통을 치는 한편, 직원들에게는 이메일을 보내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