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피아’ 인사들이 최근 다시 주요 금융권 요직에 오르게 된 배경에는 현 정부 실세들과의 친분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이헌재 전 부총리. | ||
최근 은행연합회장에 신동규 전 한국수출입은행장, 생명보험협회장에 이우철 전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이 새로 선임돼 눈길을 끈다. 신동규 회장은 지난 2006년 9월 한국수출입은행장을 끝으로 금융권에서 물러나 있다가 2년 만에 은행연합회장으로 복귀해 화제를 낳았다. 생명보험협회장직의 경우 업무평가에서 후한 점수를 받아온 남궁훈 전 회장의 유임 가능성이 점쳐졌지만 결국 이우철 신임 회장의 진로를 터줘야 한다는 논리가 먹혔다는 전언이다.
이들은 옛 재무부에서 잔뼈가 굵은 ‘모피아’ 인맥으로 분류된다. 신 회장은 1990년 재무부 국세조세과장을 시작으로 2003년 재경부 기획관리실장까지 재무부-재경부 요직을 두루 거쳐 한국수출입은행장에 올랐다. 1978년 재무부 사무관으로 재무부와 인연을 맺은 이 회장은 재무부와 재경부 경력을 바탕으로 총리실을 거쳐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까지 역임했다.
이들은 모두 모피아의 상징적 존재인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와 인연을 맺고 있다. 신 회장은 이 전 부총리가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으로 있던 2000년 재경부 공보관이었다. 이 전 부총리의 경기고-서울대 법대 후배인 이 회장은 이 전 부총리가 금융감독위원장이었을 때 금감위 기획행정실장을 맡았다.
지난 7월 수출입은행장이 된 진동수 행장도 눈여겨볼 만하다. 진 행장은 이헌재 전 부총리의 장인인 고 진의종 전 총리와 친척관계로 알려져 있으며 금감원 등에서 이헌재 전 부총리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바 있다.
모피아 인맥이 이 전 부총리를 중심으로 큰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IMF 외환위기 때부터다. 재무부 엘리트 출신으로 한동안 공직을 떠나 있었던 이 전 부총리는 1998년 금융감독위원장직에 오른 뒤 자신의 옛 부하직원들을 주요 보직에 책임자로 보내 외환위기 극복의 첨병으로 내세웠다.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부 기간 동안 이들 인맥이 경제정책을 주무르게 되면서 ‘이헌재 사단’이란 수식어가 자연스레 생겨나게 됐다.
▲ 신동규 은행연합회장, 이우철 생명보험협회장, 진동수 수출입은행장(왼쪽부터). | ||
이명박 정부는 관치를 멀리하고 민간 중심으로 금융산업을 활성화하겠다는 철학을 표방했던 터라 출범 초기 관료 출신인 모피아 인맥이 정부 산하에 발붙일 곳은 없어 보였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간주하는 현 집권세력에게 지난 두 정권 시기의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해온 모피아 인맥이 긍정적으로 비치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됐던 것.
이렇다 보니 이헌재 사단의 핵심으로 알려져 온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과 박해춘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현 정부 들어 요직에 입성한 것은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현 정부 출범 1년이 다 돼가면서 이들에겐 ‘이헌재 사단’이란 수식어보다 어느새 ‘친 MB계 금융실세’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게 됐다.
황 회장은 지난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경제살리기특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데 이어 정부 출범 이후 각종 금융기관장 후보로 거론되다 낙하산 논란 속에 지난 7월 KB금융지주 회장직을 꿰찼다. 지난 5월 우리은행장직을 내놓았던 박해춘 이사장은 ‘노 정권 인맥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는 세간의 평을 비웃듯 6월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에 오르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박 이사장은 최근 기자들과의 자리에서 “내 이름을 이헌재 사단으로 거론하지 말라”고 밝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 정부 출범 초기, 초대 금융위원장과 산업은행장, 주요 금융기관장이나 금융단체장직에 민간 출신 전문가들이 등용된 것과 대조적으로 최근 모피아 인맥이 각광을 받게 된 배경으로 이들의 외환위기 수습 노하우가 꼽히곤 한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난 10월 28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경제부처 장관만큼은 실력 있고 카리스마 있고 시장에 먹힐 만한 분이라면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일했던 사람이라도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며 이헌재 전 부총리를 거론했다. 이후 정치권에서 ‘이헌재 컴백 논란’이 불거지자 한나라당이 즉각 진화에 나서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지난 11월 28일 서울대 금융경제연구원 주최 강연회에 나선 이헌재 전 부총리는 “초기 진화를 했으면 기왓장 몇 장 깨지는 것으로 끝났을 텐데 결국 전소에 이른 남대문 화재와 똑같다” “지금도 자칫하면 비슷한 사태가 있을까 우려된다”며 현 정부 경제팀을 향해 독설을 날렸다. 강연이 끝나고 공직 복귀 여부를 묻는 기자들을 향해 그는 “주변 사람들은 내가 다시 공직에 나가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
최근 모피아 인맥의 약진 속에 ‘경제위기를 뚫는 데 구관이 명관’이라는 정서가 정부와 여권 인사들을 파고드는 상황에서 이 전 부총리가 속으로 어떤 셈법을 떠올리고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