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국정원 여직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에 대해 본격 수사에 나서면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 일요신문 DB
국정원 직원들이 인터넷에 정치편향적 댓글 작업을 벌여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은 이른바 ‘국정원 여직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이 검찰 수사 선상에 오르면서 제2라운드를 예고하고 있다. 18일 경찰은 지난 대선기간 ‘오늘의 유머’ 등 사이트 3곳에 정치 현안과 관련된 댓글을 올린 국정원 여직원 김 아무개 씨 등을 국정원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 과정에서 핵심 배후로 원세훈 전 원장이 거론되면서 그의 실질적인 개입 여부가 검찰이 이번 수사에서 밝혀내야 할 주요 숙제로 떠올랐다.
원 전 원장이 퇴임 사흘 만인 3월 23일 국정원 수장으로선 전례 없이 출국을 시도하다 검찰에 의해 출국금지 조치를 당한 정황도 이런 의혹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원 전 원장의 출국을 두고 일각에선 “‘도피성’이 아니냐”는 추측이 끊임없이 제기됐었다.
세간의 의혹을 등지고 칩거에 들어간 원 전 원장에 대한 궁금증이 이제 곧 풀릴 전망이다. 이번 검찰 수사를 필두로 원 전 원장을 둘러싼 의혹들이 하나둘씩 그 실체를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다. 최근 채동욱 신임 검찰총장이 “한 점 의혹 없이 철저하게 수사하라” “첫번째도 보안, 두번째도 보안”이라고 지시했단 전언을 비추어보면 이번 수사가 흐지부지 끝날 공산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이와 관련, 한 검찰 관계자는 25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수사의 본류는 원 전 원장이 (타깃이) 될 가능성이 크다”며 “국정원 직원 몇몇을 송치한 경찰 수사와는 차별성을 두고 ‘통’ 크게 수사를 진행하겠단 검찰의 의지가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원 전 원장으로 수사의 초점이 맞춰진 상황에서 검찰의 칼끝이 어디까지 겨냥될지에 대해서도 주목되고 있다.
현재 검찰은 채 총장이 취임사를 통해 강조한 바 있는 ‘선택과 집중’의 기로에 서 있다. 원 전 원장의 국정원법 위반 혐의와 개인 비리 혐의 사이서 어떤 부분에 주안을 두느냐에 따라 사건의 파괴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참여연대 관계자들이 3월 21일 정치 개입 논란을 빚고 있는 원세훈 국정원장에 대한 고발장 접수를 하기 전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앞서의 검찰 관계자는 “정치적 부담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찰)에서는 ‘개인 비리’로 몰 생각인 것 같다. 댓글사건의 경우 국정원 심리정보국장이 최고 윗선인 데다가 ‘원’(전 원장)이 정치 개입을 했단 물증을 사실상 찾기 불가능하다”면서 “국정원이 자신의 정체성을 뒤흔들 증거자료를 내놓겠느냐. 차라리 개인비리를 흘리고 말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어 그는 “독종’검사들로만 구성해 특별수사팀까지 만든 마당에 원을 그냥 흘려보내진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현재 검찰이 주목하고 있는 원 전 원장의 비리혐의는 무엇일까. 첫째, 청담동 ‘R 갤러리’ 예산 날치기 건이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2010년, 2012년에 걸쳐 민간인 소유 R 갤러리에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진흥기금 2억 5000만 원, 1억 원이 각각 지급된 정황에 원 전 원장이 개입됐다는 것이다. R 갤러리 건은 상임위 예비심사와 예결위 종합심사 과정 없이 막판 처리돼 당시 ‘쪽지’ 예산이라는 논란을 일으켰다. 민간 갤러리에 2년 연속 특혜적 예산이 배경에 원 전 원장의 입김이 있었다는 게 의혹의 핵심이다. 당시 의혹을 제기한 우제창 민주당 의원은 R 갤러리 운영자인 최 아무개 씨와 원 전 원장을 거론하며 “제2의 신정아를 위한 특혜”라고 꼬집은 바 있다. 우 의원의 주장대로 원 전 원장과 최 씨의 부적절한 관계가 이번 검찰 수사에서 다시금 도마 위에 오를지 귀추가 주목된다.
원 전 원장을 둘러싼 두 번째 의혹은 미국 호화 아파트 구입 건. 박 아무개 민주통합당 의원은 “원 전 원장이 원장 시절 미국에 호화판 아파트를 사뒀다는 첩보를 여러 건 받았다. 국가정보원 고위급 인사가 임기 중 해외 고급별장을 구입했다면 자금 출처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 역시 그간 정치권 내 파다하게 퍼진 원 전 원장의 호화 아파트 매입 건을 좌시하지 않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원 전 원장의 개인비리 의혹 조사에 탄력을 받을 만한 호재(?)도 발생했다. 익명의 국회 소식통에 따르면 최근 검찰이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조세피난처’ 버진아일랜드 건까지 내다보고 있단 얘기까지 나왔다. 이 익명의 관계자는 2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거기까지 수사가 진행됐는지 확인 못했으나 내부자에 따르면 아마도 3주 내로 관련 자료가 확보된 후 원 전 원장과 관련성을 따져 2차적인 수사가 이뤄질 것으로 안다”고 내다봤다.
한편 이래저래 궁지에 몰린 게 분명해 보이는 원 전 원장이 가만히 당하고 있진 않을 거란 주장도 나온다. 국회의 한 정보관련 관계자는 이에 대해 “원 전 원장은 4년간 국정원 수장으로 있던 사람이다. 최장기 국정원장이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겠나. ‘특수활동비’ 카드를 들이밀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수활동비는 별도의 영수증 제출 없이 국정원장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일명 ‘묻지마 예산’. 국정원의 경우 2012년 기준 4722억 7900만 원 지급됐다. 국정원장의 특수활동비가 통상 의례적으로 의원과의 교류에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원장과 엮인 여야 거물급 의원이 상당수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이어 이 관계자는 “원 전 원장이 개인비리 혐의로 잡힐 경우 함께 다칠 의원들이 상당수인 데다 국정원 내부 심복도 많아서 국정원 내부 숙청이 없는 한 검찰이 ‘화끈한’ 수사를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