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과 충북 음성에 위치한 동부하이텍 공장의 모습. | ||
“일부 대기업에 대한 신속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지난 12월 10일 민유성 산업은행장이 공개석상에서 내뱉은 말이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인사들은 이 발언을 ‘동부그룹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동부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그동안 여러 차례 동부 측에 ‘유동성과 관련한 자구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동부제철은 산업은행으로부터 2000억 원의 자금을 차입했다. 산업은행의 한 관계자는 “동부제철 사정이 어려워 주시해오고 있던 중 회사 측 요청으로 자금을 빌려줬다. 하지만 회사 스스로 위기 극복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경우 특단의 대책을 내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재계에서는 ‘소문으로만 나돌았던 동부의 유동성 위기가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동부익스프레스의 택배 국제사업부문 청산은 유동성 논란을 더욱 확산시켰다. 동부는 2007년 3월 중앙일보 계열인 훼미리택배를 인수해 택배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실적은 신통치 않았다. 여기에 2008년 불황의 여파로 신세계 유진 동원 등 동부와 비슷한 시기에 택배사업을 시작했던 회사들이 사업을 접었거나 매각을 검토 중인 것을 감안하면 택배사업의 일부 정리는 쉽게 납득이 갈 수도 있다. 그러나 택배사업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그룹 안팎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수를 밀어붙였던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으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동부그룹의 자금사정이 좋지 않음을 나타내는 반증’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실 동부그룹은 2008년 하반기 내내 유동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중심엔 반도체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동부하이텍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동부하이텍은 적자폭이 워낙 큰 데다 연말까지 조달해야 할 돈도 수천억 원에 달해 그룹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고 전했다.
김준기 회장의 ‘반도체 사랑’은 재계에서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김 회장은 지난 2003년 적자에 허덕이던 아남반도체를 인수해 동부일렉트로닉스를 설립하며 그 꿈을 이뤘다. 하지만 동부일렉트로닉스의 실적은 나아지지 않았고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김 회장은 2007년 동부한농과 동부일렉트로닉스를 합병, 동부하이텍을 세우며 활로를 찾으려 했지만 아직까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동부하이텍은 연말까지 2500억 원의 현금을 조달하기로 대주단과 약속한 바 있다. 동부하이텍의 현 상황을 고려하면 부담스러운 금액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유동성 논란은 새해에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를 어길 경우 대규모 자금상환 요구에 직면할 수도 있기 때문. 동부하이텍은 대주단으로부터 9000억 원대의 자금을 빌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부는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자산매각 등을 추진한다는 방침이지만 부동산시장 급랭으로 이마저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이 때문인지 최근 동부는 동부메탈의 경영권을 내놨다. 당초 동부하이텍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 100% 중 40%만 매각하겠다던 입장을 바꾼 것이다. 동부메탈은 국내 합금철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며 매년 1000억 원 이상의 이익을 남기는 알짜배기 계열사다. 이에 대해 그룹의 한 직원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언제까지 할지 모르겠다. 동부제철 동부건설 등도 어려운데 실적 좋은 계열사까지 팔아가며 유독 반도체 부문에 공을 들이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동안 김 회장은 동부하이텍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계열사를 동원해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특히 김 회장 장남인 남호 씨가 최대주주(지분율 21.14%)로 있는 동부정밀화학이 눈에 띈다. 동부정밀화학은 지난 6월 동부하이텍 지분 17.36%를 520억 원가량에 사들였다. 10월에는 동부하이텍의 차입금 192억 원에 대한 담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밖에 동부메탈은 10월 500억 원가량에 동부하이텍 건물을 매입했고 11월엔 800억 원을 대여해줬다.
최근에는 동부화재가 동부하이텍의 구원투수로 나설 것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 이미 김 회장은 자신이 보유한 동부화재 주식 약 650만 주(지분율 9.28%) 중 437만 주를 동부하이텍에 담보로 제공한 상태다. 동부화재는 지난 9월까지 당기순이익이 1400억 원가량으로 계열사 중 단연 돋보이는 실적을 올렸다. 따라서 김 회장이 동부화재의 풍부한 현금을 동부하이텍에 지원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은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동안 몇몇 시민단체는 ‘동부화재가 총수의 사금고로 악용되고 있다’고 비난해왔다. 동부화재는 2008년 동부생명과 동부증권 유상증자에 참여해 수백억 원을 출자했고, 2007년에는 서울 강남에 위치한 동부하이텍 소유 부동산을 299억 원에 사들이기도 했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동부의 내부거래에 부당한 점이 없었는지 살펴보고 있다. 유동성 곤란을 겪고 있는 동부하이텍에도 동부화재의 돈이 이용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동부하이텍에서 비롯된 유동성 위기설의 더욱 큰 문제는 이것이 그룹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동부그룹은 ‘동부CNI→동부정밀화학→동부제철→동부하이텍→동부CNI’로 연결된 전형적인 순환출자구조다. 김 회장 장남 남호 씨는 이 중 동부CNI 16.68%, 동부정밀화학 21.14%, 동부제철 7.72%를 보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동부는 다른 대기업에 비해 2세 승계가 비교적 빠르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구조는 한 계열사가 어려움에 빠지면 다른 곳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현재 동부는 동부제철과 동부하이텍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동부하이텍을 둘러싸고 계열사 간 채무관계가 얽혀있어 그 여파는 적지 않을 듯하다. 남호 씨 역시 불똥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동부 관계자는 “국제 금융위기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대주단에서도 이것을 이해해줄 것이라고 보고 우리도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