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언론인 심상기 서울미디어그룹 회장이 50여 년의 언론·출판계 인생을 돌아보는 자서전 <뛰며 넘어지며>를 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심상기 회장은 가장 마음속에 남은 기사로 1961년 7월 8일 <경향신문>에 보도한 ‘맨발의 배구팀’을 꼽았다. 전북 정읍에 있는 화호여자중학교 배구팀이 역경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는 내용이었다. ‘심 기자’는 동대문운동장(지금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자리)에서 맨발로 연습하는 모습을 본 이후 예선전부터 화호여중 팀을 주목했다. 변변한 운동화 하나 없었던 시골 소녀들은 결승전에서 부산여중을 2-0으로 누르고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우승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문제가 생겼다. 우승팀에 대한 시상식이 시합이 끝나고도 사흘 뒤에나 열린다는 것이다. 체류 여비가 모자란 탓에 화호여중 팀은 우승을 하고도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할 판이었다. 심 기자는 이러한 사연도 기사에 덧붙였다.
그러자 즉각 반응이 나타났다. 시상식 날까지 숙식을 제공하겠다는 독지가가 등장한 것이다. 배구협회도 이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시상식을 거행했다. 기사로 연출해낸 드라마였다. 화호여중 배구팀은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됐는데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했던 이춘일, 최송자 등이 화호여중 출신이다.
<경향신문> 1961년 7월 8일자 보도.
다음 날 사회면 톱기사가 나가자마자 문교부는 물론 기자실도 발칵 뒤집혔다. 그도 그럴 것이 경쟁사 기자 입장에서 출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에게 물을 먹어 체면을 구긴 셈이었다. 곧바로 기자단 회의가 소집돼 심 기자에 대한 제명 절차가 논의됐다. 다 같이 쓰기로 했는데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였다. 심 기자로서는 발표를 앞두고 있다고 해서 기다렸다 기사를 써야 한다는 주장을 납득할 수 없었지만 그는 결국 기자실에서 제명됐다.
심 회장은 책에서 “그 기사는 문교부 전용신(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별세) 장학관으로부터 입수한 것이었다. 청수장(여관·그때도 대학입시 출제위원들은 합숙을 시키며 외부와 철저히 격리시켰다)에서 채점에 매달리다가 크리스마스를 기해 하루 휴가를 얻어 집으로 온 것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밤늦게 그를 찾아갔다가 특종을 건졌다”고 밝혔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이만섭 전 국회의장, 홍사덕 전 의원, 박지원 의원(왼쪽부터). 이종현·최준필 기자
그는 당시 위원회가 준비하던 보고서를 입수해 보도했다. 경찰과 검찰, 보안사, 중앙정보부 사이에 중복된 공안행정과 수사기능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으로 대검찰청 수사국을 강화하는 방법을 통해 다른 기관의 수사기능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에 발끈한 것은 중앙정보부였다. 행정개혁조사위원회가 중앙정보부의 권위와 위상에 도전하고 있다고 생각한 탓이다. 결국 1면 톱이 되고도 남을 내용의 기사는 중앙정보부의 압력에 의해 시내판이 나간 이후 4단으로 줄여야만 했다.
더 큰 일은 다음 날 벌어졌다. 중앙청 기자실로 출근했더니 중앙정보부 기관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같이 가셔서 몇 마디 해주셔야겠다”는 기관원을 따라간 곳은 말로만 듣던 남산 조사실. 그에게 정보를 제공한 행정개혁조사위원회 위원과 여비서 역시 남산으로 불려와 있었다.
서슬 퍼런 수사관의 질문에도 심 기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취재원을 밝히는 것은 기자의 직업윤리상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입을 열 경우 취재원에게 보복이 따를 것이 분명했다. 결국 그는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했고, 이 소식이 다른 기자들 사이에서도 퍼져나갔다.
심 기자는 우리 현대 정치사 중 가장 어두운 페이지인 3선개헌의 목격자이기도 하다. 1969년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3선개헌안은 여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 공직에서 물러나 있던 김종필이 주축이었고 초대 공화당 총재를 지낸 정구영도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경향사우회로부터 축하패를 받는 모습.
표결 소식은 바깥에 있던 다른 기자들에게 곧바로 전달됐고 그는 역사의 현장을 놓쳤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그러나 다음에는 입장이 바뀌어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는 증인으로 호출되기도 했다. 1971년 12월, 비상사태 선포 후 국가보위 특별조치법이 통과됐을 때 이야기다. 이 역시 공화당이 야당을 배제한 채 안건을 올려 법안이 법사위에 회부돼 있었다.
그러던 중, 공화당 신형식 대변인이 “가볍게 술이나 한잔하자”며 그를 워커힐로 안내했다. 이미 <합동통신(현 연합뉴스)>과 <조선일보> 기자가 도착해 있었다. 세 사람은 그날 밤 국가보위 특별조치법 처리에 관한 현장 취재를 주문받았다. 거사 장소는 당시 외무위가 있던 제4별관. 이미 공화당 의원들은 인근 신라호텔에 집결해 있었다. 경찰의 선도를 받으며 반도호텔 앞길을 거쳐 순식간에 제4별관에 도착한 공화당 의원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졌다. 뒤늦게 쫓아온 동료 기자들에게 현장 목격자로서 상황을 알려주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고 고백했다.
이후 심 기자는 정치부장을 거쳐 1980년 6월 편집국장에 올랐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은 잠시뿐, 곧바로 언론통폐합과 기자들의 강제해직 사태를 겪어야 했다. 당시 보안사와 문공부는 각 언론사마다 담당요원을 상주시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암암리에 기사 작성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어느날은 보안사 요원들이 편집국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심 국장 눈에 띄었다. 보안사 요원이 신문 초벌 인쇄용지를 들고 사회부장에게 무언가 기사를 바꾸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부장 옆에 붙어서 은근히 압력을 넣고 있는 그 모습에 심 국장은 이렇게 외쳤다. “야, 이 새끼, 당장 편집국에서 꺼져.” 권위주의 시절 어두운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심 회장은 7전8기 언론인”
지난 5월 28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심상기 서울미디어그룹 회장의 <뛰며 넘어지며>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이만섭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이종찬 전 의원, 홍사덕 전 의원 등 원로 정치인과 대전고 언론인회, 중앙매스컴사우회, 경향사우회, 고려대 언론인교우회 등 언론계, 그리고 서울미디어그룹 직원 등 4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축사에서 “<뛰며 넘어지며>라는 제목처럼 심 회장은 7전8기의 언론인이었다”며 “심 회장이 정치부 기자 시절 7·4 남북공동선언에 관한 특종 보도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면서 “취재원을 밝히라며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참 용기 있는 기자였다”고 그를 소개했다.
김경래 경향사우회 명예회장은 “심 회장은 ‘올챙이’ 기자로 있을 때나 언론사 최고경영자로 있을 때나 늘 거짓과 꾸밈이 없는, 소박하면서 진실한 사람”이라며 “모험과 보험 사이, 무리와 합리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심상기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이 자리를 참석해주신 선배, 동료, 후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여러분들의 사랑과 후원 그리고 뒷받침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 설 수 있었고 오늘까지 살아갈 수 있었다”며 “언론의 역할과 책임이 참 크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언론인으로 열심히 뛰겠다”고 화답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