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틱한 패배였다. 하지만 국제축구연맹(FIFA)이 표현했듯이 ‘역사에 길이 기억될 만한 클라이맥스’였음은 틀림없었다. 터키에서 펼쳐진 2013 U-20(20세 이하) 월드컵에 나선 어린 태극전사들의 퍼포먼스는 정말 대단했다. 3~4일 간격으로 치러지는 혹독한 스케줄과 부상, 경고누적 등 숱한 어려움 속에도 힘을 잃지 않았다.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남미 강적’ 콜롬비아까지 물리치며 올랐던 8강 무대. 30년 만의 4강 신화가 목전에 온 듯했지만 아쉽게 또 다른 아시아 ‘다크호스’ 이라크에 승부차기로 무너졌다. 그래도 갈채가 쏟아졌다.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됐던 성인 국가대표팀의 참담한 모습 속에서 잠시 침체됐던 한국 축구에 영건들의 활약은 밝은 내일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태극전사들이 U-20 8강에 오르는 등 멋진 활약을 했다. 사진은 포르투갈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뒤 인사하는 모습.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사실 참담하기까지 했다. U-20 월드컵이 진행되던 중, 최강희호 체제로 치러졌던 2014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 출전했던 국가대표팀 내 불화설이 단순 ‘루머’가 아닌, 모두 사실로 드러난 탓이었다. 그렇게 뒤숭숭한 상황 속에 세계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어린 태극전사들은 ‘형보다 나은 아우’의 모습을 확실히, 또 제대로 보여줬다. 순간순간 그야말로 마법이었다. 16세부터 20세까지 청소년 선수들을 집중 관리해온 대한축구협회 제1기 전임 지도자인 이광종 감독이 이끈 선수단은 대회 내내 명승부를 펼쳤다.
사실 이광종호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대회 직전까지만 해도 몇몇 스포츠 일간지 정도가 프리뷰 형태의 특집 리포트를 준비했을 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현장 취재까지 간 기자들도 극히 적었다. 이 무렵, 국가대표팀 사령탑 선임 등 워낙 다양한 이슈들이 쏟아졌기에 솔직히 그럴 여력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옳았다.
이때 U-20 대표팀 단장 자격으로 터키 출장을 떠난 축구협회 허정무 부회장의 코멘트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우리 선수들을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희망이 있다. 왜냐고?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이 투지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물론 주목을 받기 위한 무대가 아니지만 동기부여는 충분하다. 스스로 실력을 입증해낼 수 있다. ‘어디 한 번 해보자’는 의지가 읽혀진다. 기대해도 좋다.”
이광종 감독.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이라크와 8강전도 결과와 관계없이 아름다웠다. 연장전 추가시간까지 2-3, 이라크 리드를 알리고 있었다. 패색이 짙던 종료 15초 전, 교체 투입된 정현철(동국대)의 한 방이 한국을 기사회생 시켰다. 작년 U-19 아시아축구연맹(AFC) 선수권 결승전에서 이라크를 승부차기로 꺾었던 장면이 되풀이되지는 않았지만 과정은 신선함을 안겨줬다.
상대적으로 이름값이 떨어지는 지도자를 믿고 따른 무명 선수들이 만들어낸 숱한 드라마들. 축구계는 내친김에 2016 리우데자네이루(브라질) 올림픽에서의 선전까지 바라보는 분위기가 됐다.
축구협회는 이미 이광종호 체제로 내년 인천 아시안게임을 소화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감독은 U-17 대표팀을 이끌고 2009 U-17 월드컵에서 22년 만에 8강 진출 위업을 일궜고, 2011년에는 U-20 대표팀과 함께 콜롬비아 월드컵에서 16강을 밟는 등 실력은 충분하다는 평가를 축구계 안팎으로부터 받고 있다. 연령별 대표팀 성장 과정을 모두 책임지면서 떡잎들을 키워내고 육성시킨 홍명보호처럼 이광종호도 충분히 역사를 쓸 수 있다는 데 힘이 실린다.
# 홍명보호에 남긴 교훈
U-20 대표팀 주장 이창근.
하지만 이광종호는 ‘국가대표팀’ 홍명보호에게 분명한 교훈도 남겼다. 바로 ‘팀(team)’이다.
부임 초 공언대로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여정을 끝내고 K리그 클래식(1부 리그) 전북 현대 사령탑으로 되돌아간 최강희 감독을 대신해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홍명보 감독은 공식 취임 기자회견에 참석해 뚜렷한 비전과 목표를 설명했다. “브라질월드컵에 나설 대표팀은 ‘원 팀’ ‘원 스피리트’ ‘원 골’을 슬로건으로 한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명쾌하다. 하나의 팀이 돼, 하나의 정신무장으로 오직 한 가지 목표를 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성용(스완지시티)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전임 최강희 감독을 조롱한 어처구니없는 행태가 드러나면서 홍명보호는 시작부터 꼬여버렸다. 적어도 최근 국가대표팀은 하나의 ‘팀’이 아니라는 게 사실로 입증된 탓이다. 혹자는 박주영(아스널)을 기성용과 비교한다. 전 소속팀 AS모나코(프랑스)에서 뛰며 모나코 영주권을 취득했다는 이유로 병역 기피 논란을 일으킨 박주영은 홍 감독의 보호 속에 런던올림픽 와일드카드로 출전할 수 있었고, 이제 동메달리스트 자격으로 항상 진로의 걸림돌이었던 병역 문제를 말끔히 해결했다.
박주영과 기성용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적어도 박주영은 기성용처럼 축구계 대선배에게 생채기를 남긴 적도 없고, 파벌과 분란의 중심에 선 적 없다. 일각에서 홍 감독이 박주영과 마찬가지로 기성용을 마냥 끌어안을 수 없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이광종호의 어린 태극전사들은 SNS 활용에서도 빛을 발했다. 콜롬비아와의 승부차기에서 상대 키커 슛을 막아내는 등 대회 내내 멋진 선방을 보여준 U-20 대표팀 주장이자 골키퍼 이창근(부산 아이파크)은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글귀를 자신의 SNS에 적었다. 기성용의 행태에 실망했던 팬들은 열광했다. 모두를 위해, 또 우리를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마음가짐. 이를 어린 태극전사들은 갖추고 있었다. 인격적으로도, 실력으로도 위대한 승자가 틀림 없었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