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학 감독
대회 첫날이었던 지난 1일 벌어진 한국과 중국의 C조 조별예선 1차전. 중국은 홈, 한국은 원정 경기나 다름없었다. 중국말로 힘내라는 뜻인 ‘짜요’ 응원이 몰오브아시아 아레나를 가득 채운 듯 느껴졌다.
2쿼터 중반에 터진 김선형(SK)의 덩크 한방이 경기장의 분위기를 단숨에 바꿔놓았다. 미국프로농구(NBA) 출신 이젠롄을 넘어 덩크를 터뜨리자 중국 팬들은 일순간 침묵에 빠졌다. 이때 ‘대~한민국’을 외치는 소수 교민 팬들의 응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두 나라의 농구 우열 관계에 변화가 오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한국은 중국을 63-59로 제압했다.
김선형은 자신의 SNS에 “우리 인기는 우리가 끌어올려야지”라는 애교 있는 메시지로 팬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고참 김주성(동부)은 “중국전을 반드시 이겨 관심을 끌고 싶었다”는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대만 쇼크’로 각성
대표팀은 7월 초 대만에서 열린 2013 윌리엄존스컵 대회를 다녀왔다. 유재학 감독은 충격에 빠졌다. 아시아의 높은 벽을 새삼 실감한 것이다. “장신 센터가 있는 팀에게 버티지를 못한다. 평균 15점, 7리바운드 정도 하는 선수가 우리만 만나면 그 2배를 한다”며 장신선수를 비판했다.
유재학 감독은 선수들을 비판했지만 그들에게만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다. 그들이 버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새로운 수비 전술을 집중 훈련했다. 1-3-1 지역방어다.
한국은 아시아선수권 이란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 전반까지 34-30으로 앞서갔다. 중국전 승리에 이어 자타가 공인하는 아시아 최강 이란을 상대로도 선전하자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유재학 감독은 “1-3-1 지역방어가 잘돼 앞서갈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1-3-1 지역방어는 골밑을 빡빡하게 만들어 이란의 218㎝ 장신 하메드 하다디 같은 선수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하지만 약점도 뚜렷하다. 외곽, 특히 양쪽 베이스라인에 빈 공간이 자주 발생한다. 한국은 후반전 들어 외곽슛을 얻어맞으면서 이란에 65-76으로 졌다. 하지만 대표팀은 장신 군단을 상대로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대회 첫날 중국과의 경기에서 승리 후 선수들이 기쁨을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2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준비한 지역방어가 코트에서 당장 효과를 나타냈다. 선수들은 패배 속에서도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승준(동부)은 “앞으로도 연습한 대로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했고 김주성은 “높이가 있는 팀들을 상대로 대비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란전도 충분히 잘했다. 연습한 전술을 잘 펼친다면 좋은 결과가 계속 이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신뢰가 쌓였다.
“우리 아이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해”라는 흔한 거짓말이 있다. 마음먹고 공부에 매진하면 언제든지 잘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유재학 감독은 반대다. 머리를 믿지 않는다. 쉴 새 없이 공부를 시켜 A+ 학점이 나오게끔 만든다. 그러나 그 누구도 상처를 받지 않는다. 지도자가 제시하는 정확한 비전, 그에 따른 혹독한 훈련이 코트에서 현실화되는 장면을 몸으로 체험해왔기 때문이다.
센터 김종규(경희대)는 이번 대회를 통틀어 유재학 감독에게 가장 자주 혼난 선수 중 한 명이다. “작은 선수와 매치업을 할 때 감독님은 내가 스피드가 있어 그들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런 수비를 안해봤고 주눅 들어 그런 거라며 뚫리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는 연습을 많이 시키셨다. 정말 엄청 힘들었는데 결과적으로 잘 됐다.” 김종규의 말이다. 유재학 감독의 지적은 날카롭다. 하지만 정확한 진단과 방향 제시에 선수들은 ‘만수’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농구의 미래를 보다
한국은 말레이시아전을 22점차로 이겼다. 말레이시아는 이란에 90점차, 중국에 91점차로 진 약체다. 그런데 고작 22점차라고? 일부 팬들은 실망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유재학 감독은 “점수차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은 이란전에서 외곽 수비의 약점을 발견했다. 하루 사이 외곽슛 기회를 차단할 수비 전술을 새롭게 만들었다. 11일 동안 9경기를 치르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 손발을 맞출 연습 시간은 없다. 그래서 실전을 훈련으로 삼았다. 유재학 감독은 “앞으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며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41점차로 크게 이긴 인도전 마지막 4쿼터에서는 김종규와 김민구(경희대), 문성곤, 이종현(이상 고려대), 최준용(연세대) 등 대학 선수 5명이 한꺼번에 기용됐다. 그런데 신장 200㎝의 포워드 최준용에게 포인트가드 역할을 맡겨 눈길을 끌었다.
유재학 감독은 최준용이 가진 드리블 기술과 패스, 시야 등 모든 면에서 포인트가드로서의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그래서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이번 대회에서 활용할 생각이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도전 마지막 4쿼터는 큰 의미가 없어 보였지만 대표팀은 그 시간에 미래의 한국 농구를 그려봤다. 1분, 1초, 대표팀에게 아무 목적 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없다.
박세운 CBS 체육부 기자
“바레인전선 태술이 형이 양보^^”
김선형이 중국 이젠롄을 뚫고 덩크하는 모습. 원안 사진은 김태술. 연합뉴스
당시 경기는 한국에 TV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생중계를 의식한 것 같다는 농담을 건네자 김선형은 “태술이 형이 달려오는 저의 절실한 눈빛을 봤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김선형은 화려하다. 하지만 겉멋에 빠진 선수는 아니다. 이젠롄을 넘어 덩크를 한 장면에도 사연은 있었다. “사실은 레이업을 하면 찍힐 것 같아서 덩크를 한 것이다. 만약 레이업을 했다면 블록을 당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멋있는 플레이를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득점을 위한 최상의 판단을 한 것이다.
선수단의 분위기는 최고조다. 코칭스태프는 고참으로서 팀을 잘 이끌고 있는 김주성과 양동근(모비스), 조성민(KT)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훈련 분위기도 좋다. 높은 집중력을 요구하지만 무거운 분위기를 덜기 위해 예능적인 요소도 가미했다. 짜장, 짬뽕 등 친숙한 음식을 약속된 패턴 이름으로 사용한다. 경기를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서 짜장, 짬뽕을 외쳐댄다. 중국집도 아니고.
박세운 CBS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