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혈액 감식 등으로 한정됐던 용의자 식별이 최근엔 눈이나 머리 색깔, 성씨 추적까지 가능해졌다.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센터의 유전자 감정 실적은 연간 10만 건을 훌쩍 넘는다. 박기원 센터장(53)은 “요즘은 혈흔 반응, 정액 반응 정도는 실험실로 올 필요 없이 현장에서 키트 등을 이용해 수사관이 직접 채취한다”며 “연구실은 현장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밀접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고 피력했다.
센터의 업무는 크게 범죄현장, 정보 검색, 신원확인 등 3가지로 나뉜다. 범죄현장 DNA 감식의 경우 살인·강도 등 강력사건 현장증거물, 강간·추행 등 성범죄, 현장증거물 중 시급을 다투는 분석물을 취급하는 ‘긴급TF팀’으로 구성돼 있다.
박 센터장으로부터 설명을 듣던 중 지난 7월에 일어난 제주도 어린이 성폭행 사건 관련 서류가 도착했다. 현장증거물로 제출된 음모 9점 중 물티슈에 묻은 음모 1점에서 채취한 DNA를 용의자 1370명과 일일이 대조해 범인을 검거했다는 내용이었다.
DNA 감식은 증거물 오염 방지가 철칙이다. 센터의 2~4층까지 오염을 피하고 시료를 안전하게 취급하기 위한 시설 및 장비들이 운용되고 있다. 유전자 분석은 시료에서 DNA를 채취한 뒤, 반응액을 통해 DNA 분리→증폭→정량→유전자형 판독의 과정을 거친다.
박 센터장을 따라 취재팀이 방문한 2층 실험실은 DNA 채취 및 분리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증거물 보관실의 악취가 심한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후드 안에서 일하면 작업 능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냥 마스크만 쓰고 일한다”며 “이젠 익숙하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답했다.
유전자 감식기법 도입 초기엔 DNA 분리작업 시 발암 물질인 페놀을 썼다. 정량 작업 때는 DNA 구조를 파괴하기 위해 ETBR이라는 발암 물질(현재는 사이버그린으로 대체)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그는 “매일 증거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야근이 잦지만, 옛날보다 장비가 좋아졌다”며 “일일이 손으로 하느라 물집이 잡히고, 주부습진에 걸리기도 했다. 지금은 다 자동화가 돼서 편리하고 시간도 단축됐다”고 설명했다.
3층 실험실에선 DNA 분리 및 증폭 업무를 담당한다. 시료 오염을 막기 위해 입구에 에어샤워기를 설치했다. 미세 먼지도 허용되지 않는 복잡하고 예민한 작업이다. 덕분에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해 취재팀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유전자감식센터에서 연구원이 유전자감식 작업을 하고 있다.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국과수에선 살인·폭력 등 강력 사건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4대악 근절’ 정책과 관련해 불량식품 판정 의뢰 및 절도·고소 사건도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센터 법생물연구실 이양한 박사는 동물 종 식별 및 불량식품 판정과 관련한 흥미로운 일화를 공개했다.
이 박사는 “홍어·도미·참치 등 횟감으로 쓰이는 고급 생선들의 진위 여부 분석 건이 부쩍 많아졌다”며 “태국에서 구입한 코브라 쓸개를 분석해 보니, 닭 쓸개로 밝혀진 경우도 있었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한 관광객이 코브라 쓸개라는 말을 믿고 덜컥 고가에 정체불명의 물건을 사들였는데 국내로 돌아와 속은 것 같은 생각에 경찰서에 신고, 결국 국과수에서 진위 분석을 담당하게 됐다. 결국 코브라가 아닌 닭 쓸개로 밝혀지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한 번은 샥스핀 요리 속 상어 지느러미가 이 박사팀에게 온 적도 있었다. 샥스핀 속 지느러미가 정말 상어의 것이 맞는지 경찰에 신고한 것. 분석 결과, 100% 상어 지느러미였다.
시골에서 은밀히 운영된 불법도축장 수사 결과의 증거로 활용하기 위해 현장에서 수집된 동물 털 뿔 뼈 등이 연구실로 오기도 한단다. 이것들은 각각 소 염소 돼지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박사는 시골 동네에서 벌어진 ‘진돗개 누명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다. 양계장 닭들이 정체불명의 개에게 물려 죽어나가는 일이 연속으로 발생했는데 우리에 걸린 개털이 증거물이라는 이름을 달고 국과수 이 박사팀에게 왔다. 개의 유전자형에만 반응하는 개체 식별 시약을 통해 분석한 결과 옆집 진돗개는 누명을 벗었다.
국과수의 업무 중 가장 까다롭고 중요한 것은 사실 신원 확인 작업이다. 불상변사자 실종 아동 행방불명자 독립유공자 후손 확인 작업이 그것이다. 최근 일어난 인천모자 살인사건의 경우 인체조직은 이미 부패해서 시료로 쓸 수 없었다. 인골로 대조해 정선과 울진에서 각각 발견된 시신 사이에서 친자관계가 성립한다는 결론을 얻어낼 수 있었다.
불상변사자의 시신에서 채취한 DNA와 그가 썼던 칫솔 분첩 루즈 등에서 확보한 DNA를 대조해 신원을 확인하기도 한다.
최근 국밥집 여종업원 살인사건 해결에 ‘성씨 분석’이 도입돼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2년 10월 충북 청주의 한 국밥집에서 종업원이 잔인하게 살해된 후 금고의 돈이 없어졌다. 범인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자신이 먹던 밥그릇 수저 물컵까지 챙겨 달아났다. 그러나 그가 베어 문 깍두기에서 극소량의 타액이 발견됐고, 이것을 통해 범인의 성씨가 희귀 성씨인 ‘ㅎ’씨일 수 있다는 판정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이어 그는 “통계학이다 보니, 100% 정확할 수는 없다”면서도 “99.99%까지 유전자형이 똑같은 사람은 없기 때문에 보조적으로 쓸 수는 있다. 특이한 성씨일수록 확률이 높아진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기법에도 맹점은 있다. 우리나라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성씨를 쓰기 시작한 삼국시대 이래로 순수하게 아버지에서 아들로 혈통이 이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조선시대에 재물을 축적한 상민이나 천인이 양반 호적을 산 경우도 있었고, 20세기 초 호적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당시엔 그때까지 성을 갖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왕족의 성씨인 김·이·박씨의 성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박 센터장은 “외국에선 널리 활용하고 있다”며 “현재는 보조적으로 쓸 수 있다. 좀 더 보완된다면 앞으론 널리 쓸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높였다.
이밖에 센터에선 범죄수사에 인체미생물, 종족 감정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인체미생물 감정이란 사람의 손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주거생활환경에 따라 달리 검출되는 세균들이 있는데 이것을 통해 용의자를 특정하는 방법이다. 용의자의 신발창에 묻은 흙과 사건 현장의 흙을 비교 분석하는 토양미생물 분석도 같은 범주다.
종족 감정이란 특정한 종족에게 나타나는 유전자형을 연구 분석하는 것으로,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외국인 범죄에 대비하려는 시도다. 최근 일어난 성북동 노파 살해사건을 ‘종족 감정’으로 용의자가 동남아시아인이라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박 센터장은 평소 언론의 사건사고 기사를 꼼꼼히 스크랩해 둔다. 그는 취재팀에게 언론 보도를 차곡차곡 정리한 두꺼운 스크랩북을 일일이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박 센터장은 미국이 최근 시행한 ‘이노센트 프로젝트’를 언급했다.
DNA 분석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90년대 이전엔 혈액형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으면서 결백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려 처벌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최근 비약적으로 발달한 DNA 기술로 여러 사건들을 재조사하면서 수많은 사건들의 결과가 뒤집어졌다. 2011년 한 해에만 20건의 사건이 무죄로 판명나면서 미국 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한국의 경우 증거물을 보관하지 않았다”며 “증거물만 잘 보관돼 있다면 현재의 발달된 감식기술로 뒤집어질 만한 사건도 있지 않겠느냐”라고 조심스럽게 밝히면서 아쉬워했다.
신상미 기자 sh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