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비서실장(오른쪽) 취임 이후 공공기관장 임명에 가속도가 붙는 것을 두고 일각에선 ‘김기춘 1인 파워’가 정권의 인사를 좌지우지 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진제공=청와대
“낙하산 인사는 이번 정부에서는 없을 겁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공공기관 자리에 낙하산 인사들이 앉게 되는 것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의 이런 입장에 당시 감사원은 ‘낙하산 특감’까지 착수하며 공공기관 내 전문성이 없는 낙하산 인사를 걸러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때문에 다수의 공공기관 낙하산 수장들은 혹시나 대대적인 피바람이 불까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이제 더 이상 정치인 출신이 아닌 전문성 있는 인사가 공공기관에 내정되는 것이 아니냐는 기대 섞인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대대적인 공공기관장 물갈이 인사를 앞두고 있는 현재, 낙하산들이 물러난 자리에 또 다른 낙하산들이 투입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른바 ‘친박계 낙하산’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최근 새누리당에서 청와대 측에 “대선 공신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더욱 불거졌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공공기관장을 포함해 공공기관 내 빈자리가 100여 곳이 넘는다. 그만큼 공공기관 인사가 늦어지니 자리를 기다렸던 친박 인사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인사에 대한 여러 불만들이 이제는 ‘임계점’에 다다른 상태”라고 전했다.
지난 10일 저녁 광화문 인근 한 한식당에서 열린 청와대 참모들과 새누리당 지도부의 비공개 ‘막걸리 회동’은 공공기관장 인사에 대한 달라진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최원영 고용복지수석 등 참모진 일부가 참석했고, 새누리당에서는 황우여 대표 등 최고위원들과 홍문종 사무총장이 자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1시간 30분가량 진행된 이날 회동은 공공기관장 인사와 관련한 내용이 주요 화두였다고 한다. 당시 참석자들에 따르면 황우여 대표는 회동 후 김기춘 비서실장과 따로 독대까지 하며 ‘공공기관장 추천 명단’을 전달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사실상 대선 공신 명단이 담긴 ‘공신록’을 청와대 측에 전달한 셈이다.
그런데 ‘공신록’이 전달된 것은 이번 한번뿐이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지난 13일 기자 간담회에서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 때 당에서 (추천 명단을) 가져갔다”라고 전했다. 정권 초 청와대로부터 ‘당에서 모아서 공식적으로 (리스트를) 전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는 것. 해당 리스트는 서병수 당시 사무총장이 취합해 허태열 전 비서실장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서병수 의원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며 “전체 인원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00명에는 훨씬 못 미친다”고 대략적인 숫자를 밝히기도 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정권 초에는 청와대 민정 라인에 당 차원으로나 개별적으로 올라온 이력서가 쫙 쌓이기 마련이다. 리스트를 두 번이나 올려 보낸 것은 사실상 인사를 빨리 해달라는 ‘압박용’으로 볼 수 있다”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청와대 측에 전달된 리스트는 공공기관 인사에 얼마나 반영됐을까. 청와대 측은 “당에서 통보한 명단은 청와대 인사팀의 풀(pool)에 포함시켰다. 정해진 절차와 일정 등에 맞게 진행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결국 인선 뚜껑을 열어봐야 ‘리스트 반영률’을 알 수 있을 전망이지만, 최근 들어 청와대 내부에서 공공기관장 인선 작업에 부쩍 속도를 내고 있는 모습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미 교체해야 할 공공기관장 인선 중 90%는 마무리 단계”라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청와대 내부에 ‘김기춘 체제’가 들어선 이후 인선 과정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한 여권 인사는 “허태열 전 비서실장의 경우 절대로 대통령에게 싫은 소리를 할 스타일이 아니다. 인사 문제를 재촉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들어선 이후 인사에 속도가 붙은 것은 물론 인사가 지나치게 늦었다는 측면도 있지만 ‘왕실장’의 파워를 보여주는 일면일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인사에 대한 모든 것을 관여한다는 ‘만기침람’ 스타일인 박 대통령이 공공기관장 인선 작업이 한창이던 시기에 해외순방을 다닌 점을 두고도 “인사 문제에서 김기춘을 신뢰하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인사 문제로 박 대통령의 눈 밖에 나 결국 비서실장 자리에서 중도하차한 것으로 알려진 허태열 전 비서실장과는 대조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번 공공기관장 인사의 ‘키’는 김기춘 비서실장이 쥐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최종 승인은 박 대통령이 내릴지라도 ‘누구를 최종 적임자로 올릴 것인지’에 대한 작업은 여권 내 1인 파워인 김기춘 비서실장 손에 좌지우지 된다는 것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설사 대선 공신이라 할지라도 김기춘 비서실장 눈 밖에 났다고 하면 인사는커녕 이력서도 못내는 게 요즘 현실이다.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데다 노회하고 치밀한 김기춘 비서실장이 괜히 군기반장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일각에서는 ‘김기춘 살생부’가 존재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은밀하게 떠돌기도 했다. 김기춘 실장 눈에 찍혀 해당 살생부에 포함됐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인사들도 적지 않다는 전언이다. 가히 김기춘 1인 파워의 위세가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친박계 낙하산 부대가 대대적으로 투하를 예고하고 있는 가운데 더욱 문제는 친박계 내부에서도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다. 같은 친박이라도 김기춘 비서실장의 ‘라인’인지에 대한 여부에 따라 ‘급’이 달라지기에 내부 권력투쟁 조짐도 감지되고 있다. 앞서의 정치권 관계자는 “김기춘 비서실장이 청와대에 입성한 이후 박 대통령의 복심이라고 불렸던 이정현 홍보수석도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한다고 들었다. 청와대 참모진뿐만 아니라 새누리당 지도부나 심지어 정홍원 국무총리도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쩔쩔매기는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1인 독식 구조라 볼 수 있는데 일부 친박 인사들 속에서는 이에 대한 불만이 차츰 쌓여가고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각에서는 김기춘 비서실장의 ‘친박 군기잡기’에 대한 일화도 퍼져 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김기춘 비서실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친박계 인사인 A 의원을 두고 “가만 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대놓고 말했다는 전언이 퍼지면서 당-청에서 난리가 났었다는 것이다.
결국 박근혜 정권 하 대대적인 공공기관장 인선은 친박계 낙하산들의 아귀다툼을 넘어 ‘왕실장’, ‘부통령’으로 일컬어지는 김기춘 비서실장의 1인 파워가 크게 작용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번 정권에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 방지’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고 보는 회의적인 시각도 이어지고 있다.
정치평론가 이종훈 IGM 컨설팅 대표는 “박근혜-김기춘 두 톱이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밀실 인사와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흡사 과거 ‘총재-부총재 정치’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다”라고 꼬집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