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서울역 앞 고가도로 위에서 분신해 숨진 이남종 씨의 영결식이 4일 서울역광장에서 수많은 추모객이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 임준선 기자
경찰은 이 씨가 숨을 거둔 지 3시간 만인 1일 오전 10시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 씨의 자살동기를 “부채, 어머니의 병환 등 복합적인 동기로 분신을 마음먹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씨의 동생이 “신용불량 상태에서 빚 독촉으로 많이 힘들어 했다”며 “경제적인 이유 말고는 분신을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한 진술도 포함했다. 경찰 발표는 이 씨의 분신이 ‘정치적 죽음’과 연결되는 것을 막으려는 뉘앙스였다.
그러나 이 씨의 형이 경찰 발표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면서 상황이 미묘하게 꼬여였다. 이 씨의 형은 “경찰이 왜 그렇게 발표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무슨 이유인지 사건을 빨리 무마하려는 것 같다”고 밝혔다. 고인의 친형과 함께 경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은 박주민 변호사도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이 씨와 함께 거주하지 않는 이 씨의 동생을 광주에서 서울로 데려온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이 씨는 형과 어머니와 살았다. 이 씨의 상황을 더 잘 아는 형의 공식적인 의견 청취가 끝나기도 전에 경찰의 보도 자료가 배포됐다. 유가족의 공식의견을 반영할 기회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씨가 신용불량자였다는 점과 분신하기 전 들어놓은 보험의 수급자를 동생 앞으로 바꿔놓았다는 점 등은 이 씨의 죽음에 또 다른 배경이 있을 수 있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일부 보수 언론에서는 이 씨가 동생 앞으로 수급자를 변경한 보험이 ‘생명 보험’이라고 보도, 이 씨의 죽음이 개인적 문제에서 비롯된 듯한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이 씨가 한 달 전 가입한 보험은 운전자 보험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투사 고 이남종 열사 시민장례위원회(장례위)’의 백은종 씨는 “이 씨가 가입한 보험은 거액의 생명보험이 아니라 한 달에 2만 7700원을 넣는 운전자 보험이었다. 이마저도 3달을 부어야 수급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씨는 가입한 지 한 달 정도밖에 안됐다. 실질적으로 동생이 수급받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또한 이 씨가 남긴 유서에 채무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해 힘들다는 부분은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 유족 측의 주장이다. 앞서의 박주민 변호사는 “이 씨가 신용불량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빚은 이 씨 형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며 이미 7~8년 전 생긴 빚이다. 이와 관련해 이 씨는 형에게 독촉을 한 적도 없다고 한다. 7~8년 전 빚으로 인해 갑자기 분신을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박 변호사는 “유족이 유서를 확인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 유서를 보여 달라고 하자 경찰이 국과수에 보냈다고 말했다”며 “지속적으로 유서를 보여줄 것을 항의하자 결국 경찰이 유서를 공개했다. 언론에는 유가족이 유서 받길 거부했다고 해명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고 주장했다.
2일 민주당 문재인 의원이 서울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 마련된 이남종 씨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사진은 문 의원이 방명록에 남긴 글귀. 구윤성 기자
한편 이 씨에 대해 한 지인은 “평소 조용한 성격이고 착했다. 남을 미워하거나 하는 성향은 별로 없었고 시를 써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등 친절한 사람이었다”라고 전했다. 빈소에서 만난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 씨는 “이 씨의 대학동기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 씨는 조선대 영문학과에 입학한 91년부터 96년 육군 학사장교를 하기 전까지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과 행동이 일찍이 있어왔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장례위 백은종 위원도 “이 씨가 민주열사가 잠들어 있는 광주 망월동 민주묘역에 안장되는 것도 광주시국회의와 5·18 유족협회, 광주시의회의 협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열사’에 대한 정치적 논란을 일축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김한길 “특검도입, 당 최우선 과제”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이남종 씨가 분신으로 촉구한 ‘국정원 특검 도입’을 새해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실제로 민주당은 이 씨의 분신을 ‘투쟁의 열기’로 승화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민주당은 2일 관련 논평에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커다란 사회적 울림에 대한 답변이 자기희생이어서는 안된다”며 “박근혜 정부의 국민 무시와 민주주의 유린에 맞서기 위해서는 살아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국가정보원 등 불법행위에 대한 진실규명을 위해 특검도입은 2014년 민주당의 최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최근 특검을 요구하며 분신을 감행한 이 씨의 안타까움에 대해 정치권은 깊이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병헌 원내대표도 “2014년에 대통령에 바라는 것은 특검의 수용이다”면서 “이 씨의 죽음을 결코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결단을 내려 과거의 앙금을 다 털고 가야 한다”며 “이대로 하면 임기 중에도 임기가 끝난 후에도 대선논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3일 이 씨의 빈소를 방문해 기자를 만난 한명숙 전 총리도 “대한민국의 아픔을 짊어지고 간 이남종 열사를 보면서 정치인으로서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며 “이남종 열사가 두려움과 결핍을 모두 안고 가겠다는 말에 오히려 용기를 내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 씨의 죽음이 국정원 특검을 재점화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단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검을 관철시키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이남종 열사가 뒤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 전 총리는 이 씨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일각의 평가에 대해 “이런 일이 생기면 비판적인 시간을 가지고 평가를 하는 사람이 늘 있다. 신경 쓰지 않는다”며 “이 세상에 정치가 아닌 것이 어딨나. 이 계기를 역사적으로 한 발짝 나아가는 계기로 삶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 씨의 죽음에 대해 민주당이 적극적인 정치 공세에 나선 가운데 새누리당은 브리핑 등 공식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 씨 빈소에는 새누리당 인사의 방문은 없었고, 화환도 도착한 게 없어 민주당과는 대조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대통령 퇴진과 관련한 사건이라 당에서도 입에 거의 올리지 않는 분위기다”며 조심스러운 자세를 보였다. 한편 당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로 ‘반 박근혜, 반 새누리당’ 정서가 확산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는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