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패션매장들이 신상품이 깔리는 2월을 앞두고 디자인을 베끼고 반품하는 ‘카피슈머’ 경계령을 내렸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박은숙 기자
일명 ‘빡빡이’가 뜨는 날이면 부산, 김해 등 경남 일대 전자업체 서비스센터는 일동 긴장모드가 된다. ‘빡빡이’로 통하는 양 아무개 씨(31)는 5년간 유명 전자제품 회사의 서비스센터를 돌며 고의로 고장 낸 제품을 상습적으로 환불받거나 행패를 부리는 악명 높은 블랙컨슈머로 유명했다.
양 씨는 환불이나 보상금을 요구하며 생떼를 부릴 때마다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고, 몸에 문신을 보여주며 위협적인 언행을 일삼았다. 심지어 서비스센터 상담직원에게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점점 심해지는 양 씨의 행패를 참지 못한 서비스센터 직원들은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양 씨는 지난해 12월 구속되면서 ‘악성 진상고객’의 말로를 걷게 됐다.
양 씨의 이 같은 악질 블랙컨슈머 행각이 가능했던 것은 양 씨의 범행을 도운 일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양 씨를 구속하면서 A 씨(51)와 B 씨(26)씨, C 씨(여·28) 등 3명도 불구속 입건했다. 양 씨는 주로 중고 핸드폰을 가져가 서비스센터에서 최신형으로 바꿔달라고 행패를 부린 다음 인터넷에 다시 고가로 되파는 수법을 썼다. 이때 타인명의의 중고 핸드폰, 즉 대포폰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준 공급책 역할을 한 사람이 A 씨였다. 양 씨는 본인이 블랙리스트에 올라갈 것을 감안해 B 씨와 C 씨의 통장을 양도 받는 수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양 씨가 이런 수법으로 2008년 1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경남일대를 돌며 악성불만을 제기해 부당 이득을 취한 금액만도 8600만 원. 부산 연제경찰서 신삼성 형사는 “양 씨는 서비스센터에 불만을 제기하면 그것을 접수 받는 서비스센터의 평가 점수가 낮아진다는 점을 악용했다”며 “피해자가 인정한 것만 68건이지만 실제로는 100건이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 씨의 보복이 두려워 진술을 꺼리는 피해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칼만 안 든 강도’와 다름없는 양 씨 일당과 같은 수법은 서비스센터 직원들사이에서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몇 해 전에는 용산 전자상가에서 일했던 적 있던 문 아무개 씨 등이 중고 가전제품을 고의로 고장 낸 뒤 국내 유명 전자회사 서비스센터 직원들을 협박하거나 매수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문 씨의 범행에 연계된 중고업자 등 일당만 해도 32명에 달했다. 전자제품이나 서비스센터 운영 방식을 잘 이해하는 이들은 특정부품을 고장 내거나 단종된 모델을 모으는 방식을 사용했다. 문 씨가 체포될 당시 집에 수십 대의 전자제품이 쌓여 있었다는 것은 이들 조직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움직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렇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블랙컨슈머 일당을 일반 소비자와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전자업체 AS센터에서 8년간 근무했다는 직원 윤 아무개 씨는 “본사에서도 주의를 요망하지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블랙컨슈머는 제보나 신고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잡아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라며 “중고업자를 끼고 불만을 제기하는 이유는 중고업자들이 어떤 제품이 단종됐는지 어떤 부품이 교체가 안 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일부러 고장 낸 것 같은 제품이나 비공식 AS센터에서 고친 제품을 정품 부품으로 무상수리해 달라는 고객 중 의심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로서는 고객에게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블랙컨슈머 온상지로 알려진 백화점도 신상품이 깔리기 시작하는 2월을 앞두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고가의 옷을 구입했다가 옷을 분해해 패턴을 표절한 뒤 재 가봉해 상습적으로 환불하는 고객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블랙컨슈머를 ‘카피슈머’라고 부르는데 요즘 ‘카피슈머’는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환불대행알바’를 끼고 활동해 적발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강남 소재 백화점에 근무하는 박 아무개 씨(27)는 “카피슈머는 오히려 명품을 건들지 않는다. 이들은 수입의류나 T 브랜드, L 브랜드 등 고가 브랜드를 타깃으로 삼는다. 고가의 제품에도 굳이 현금을 내거나 포인트 적립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카피슈머’로 의심받는다”고 설명했다. 중구 소재 백화점에 근무하는 성 아무개 씨(29)도 “디자인 카피일 경우 사진촬영이면 충분하지만 패턴을 베끼려면 옷을 다 뜯어보는 수밖에 없다. 비싼 브랜드일수록 핏(Fit:잘 어울리는)이 사는 패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표적이 된다”며 “한번은 화가 나서 환불대행 업체를 찾아보려는 심정으로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주부들이 모이는 카페나 패션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를 통해 환불대행 알바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아 깜짝 놀랐다. 카피 블랙컨슈머의 경우 1명 당 1~3명의 환불대행 알바를 끼고 1건당 1만 원의 수당을 지불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털어놨다.
최근에는 인터넷과 SNS가 발달하면서 이를 이용하는 블랙컨슈머도 늘어나고 있다. 한 전자업체의 경우 카페와 블로그를 통해 모인 제품결함 피해자와 협상을 하면서 3명의 주동자들이 집중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포착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 3명은 경쟁사의 협상과정에도 매번 등장하는 것을 알게 됐다. 대부분 이런 블랙컨슈머들은 인터넷을 통해 동조자를 모으고 최대한 많은 사람이 제품결함으로 피해를 입은 것 같은 여론을 형성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역할을 한다.
강성경 기업소비자전문가협회 사무총장은 이에 대해 “블랙컨슈머가 양산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기업과 소비자 간의 보상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예 부재하기 때문”이라며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져야 블랙컨슈머 발생을 근절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고객님, 자꾸 이러시면 경찰 부른다~”
블랙컨슈머들의 수법이 날로 교묘해지면서 이들에 대한 기업들의 대응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기업들은 이미지를 위해 직원들에게 인내만을 강요하면서 ‘감정노동자’를 양산해 내는 부작용을 겪기도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블랙컨슈머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특히 블랙컨슈머가 온 사회를 긴장시키는 일이 잦았던 지난해에는 블랙컨슈머에 대응하는 방안과 관련한 세미나와 기업교육 프로그램이 눈에 띄게 늘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블랙컨슈머 관련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실시하는가 하면, 유통업계들은 블랙컨슈머 매뉴얼을 마련해 응대 방법을 교육하는 대응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특히 악성불만이나 성희롱 등에 시달리는 콜 센터 직원들을 중심으로 블랙컨슈머 대응 조치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현대카드의 경우 민원을 제기하는 고객이 성희롱 등 폭력적인 말을 하면 경고조치 후 상담원이 먼저 전화를 끊을 수 있도록 했다. 삼성카드 또한 욕설과 폭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녹음 사실과 상담 중단 가능성을 경고하는 안내를 3차례씩 하는 ‘333응대원칙’을 도입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다산콜 상담센터의 경우 지난해 음란전화로 성희롱을 일삼은 악성 이용자 3명을 고소하는 등 강경한 대응을 한 바 있다.
외국의 경우 대응 매뉴얼을 마련하는 것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블랙컨슈머에 대응하고 있다. 주요 부품을 빼낸 아이폰을 애플 책임이라며 새로운 폰으로 교체하는 (리퍼) 서비스 수요가 중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늘어나자 애플은 한국과 중국에서 아이폰 AS 기준을 더 강화했다.
스웨덴의 세계적 인테리어 가구업체인 이케아의 블랙컨슈머 처리 사례도 유명세를 탔다. 이케아는 패밀리멤버십 카드만 있으면 무료커피를 제공하고 매장의 의자와 카페테리아 등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유독 중국 상하이 이케아 매장에 노인들이 모였다. 하루에 많게는 700명까지 자리를 차지했다. 알고 보니 이 노인들은 ‘노인데이트클럽’을 통해 모인 회원들이었다.
직원들은 일반 고객의 불편이 가중되는 점을 들어 무료 커피 서비스를 중단할 것을 제안했지만 지점장인 드루아 씨는 다른 방식으로 블랙컨슈머 문제를 풀었다. 노인 데이트 클럽 회원들을 위한 공간을 따로 지정하고 이들 회원들에게는 따로 만들어진 초록색 컵을 제공한 것. 이 방법은 일반고객에게 가는 불편도 줄이고 만남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노인 회원들의 숫자도 줄일 수 있었다. 드루아 씨의 블랙컨슈머 대응 방안은 “손님은 왕이다”로 일관했던 한국서비스업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배]
화장품 절반 사용 후 “나랑 안 맞아…바꿔줘!”
“5000원짜리 긴급주유를 위해서는 5000원 이상의 인건비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최근에는 인터넷 상거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쇼핑몰에도 신종 블랙컨슈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쇼핑몰의 VIP 고객이 구매대행을 해주겠다며 직접 구매자를 모집하는 것. 쇼핑몰 VIP 회원의 경우 배송료가 무료이기 때문에 VIP 회원을 통해 구매를 하면 구매자는 배송료를 아낄 수 있다. 그리고 VIP 회원은 자신의 돈을 쓰지 않고도 VIP 회원 자격을 유지하면서 쇼핑몰에서 제공하는 각종 편의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 이러한 얌체 VIP 고객의 꼼수에 고스란히 그 피해는 업체의 운송료 부담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고객을 직접 대면해야 하는 백화점의 경우 블랙컨슈머로 인한 시름은 더욱 깊다. 백화점 1층 화장품 판매 직원들에겐 고객의 클레임이 일상이다. 반쯤 사용한 화장품을 가져와 바꿔달라고 하거나 피부에 트러블이 생겼다며 보상을 요구하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아 이제는 오히려 그들 덕에 체계적인 대응시스템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중구 소재 백화점에서 수입화장품을 판매하는 최 아무개 씨는 “오히려 고객의 클레임이 대처방안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때도 있다”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런 최 씨도 최근 꺼려지는 고객이 생겼다. 최 씨는 “업체마다 다르지만 보통 10만 원 이상 제품을 구매한 고객에 한해 풀 메이크업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런데 10만 원 이상의 제품을 구매한 후 메이크업 서비스를 받고 나서 다음날이나 일주일 후 그 제품을 그대로 환불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함께 챙겨줬던 샘플을 돌려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티켓을 구매해야 가능한 메이크업 서비스에도 타격이 크다”며 “백화점에 블랙컨슈머 대응 매뉴얼이 있다 해도 결국 그 피해는 백화점에 입주한 브랜드가 감당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고객이라는 이유로 항의하지도 못한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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