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반상의 라이벌인 이세돌 9단(위 사진 오른쪽)과 구리 9단.
14일 정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중식당에서 한국기원 양재호 사무총장 주최로 신년 기자간담회가 있었다. 모임이 끝날 무렵 중국 바둑계의 소식을 전해 주는 한국기원 김경동 통신원이 참석한 기자들에게 책 한 권씩을 선물했다. <한-중 바둑영웅 이세돌-구리 격전보>였다. 2000년대 후반 당대 최고의 라이벌로 세계 바둑계를 주름잡았던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의 바둑 28국을 구리 9단의 자전 해설로 펴낸 단행본을 김경동 통신원이 번역해 한국어판으로 선보인 것.
프로 고수의 실전보를 해설한 책으로는 19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도서출판 법문사에서 시리즈로 펴낸 <기성-명인전>이 지금도 역작으로 꼽히고 있다. 일본의 1-2등 기전인 ‘기성전’과 ‘명인전’ 도전7번기의 신문관전기를 책으로 묶은 것. 글쎄, 그때는 바둑책이 별로 많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올드 팬들은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조남철 9단과 중국문학가 권희철 선생이 공동작업한 <기성-명인전>의 격조와 향기를 생각한다. 수려한 번역이었다.
“이세돌 9단이 휴직할 때 그가 프로 생활을 접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고, 혹시라도 늦기 전에 이 9단과의 격렬했던 싸움의 역정을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8년 동안 이 9단과 대국을 할 때면 언제나 지금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처음 구리 9단을 만났을 때 이창호 9단을 대하는 것처럼 반드시 이겨야 할 상대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반상에서는 적수였지만, 반외에서는 친구가 되었고, 승부에 대한 갈망을 합작해 기보로 남기게 되었다.”
구리 9단과 이세돌 9단이 책의 서문에서 밝힌 소회다.
이세돌 9단은 지금까지 구리 9단과 비공식대국을 포함해 36국을 두었는데 18승1무17패로 1승을 앞서 있다. 구리 9단은 2011년 5월 17일 제1회 ‘진포산 한·중·일 바둑 고수 초청전’까지의 28국을 해설했다. 당시 전적은 14승14패, 동률.
김경동 통신원은 몇 년 전에도 마샤오춘 9단의 저서 ‘바둑병법 36계’를 번역해 국내에 소개한 바 있다. 서림문화사, 국배판 양장본 448쪽, 3만 5000원.
#2. <실전파워 5단>
세계무대의 ‘일지매’였던 유창혁 9단이 언제부터인가 이제는 승부가 아닌 해설로 바둑TV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주로 국내외 주요 기보를 해설하더니 요즘은 영역을 바둑강좌로도 넓히고 있다.
유 9단이 지난해 7월부터 약 3개월 동안 진행했던 바둑TV의 강좌 <실전파워 5단>이 단행본으로 나왔다. <실전파워 5단>은 바둑TV 강좌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했고 유 9단은 2012-13년, 2년 연속 바둑TV 시청자가 뽑은 최고의 해설자 1위에 올라 승부 스타와 명강사는 별개라는 통설을 뒤집었다. 승부 실력과 강의 실력은 비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 <실전파워 5단>은 지난해 11월 DVD로도 출시되며 일구월심 실력이 늘기를 열망하는 바둑팬들의 갈증을 달래 주었다.
여기서 말하는 5단은 물론 아마5단, 옛날식으로 말하면 1급이다. 프로 계단의 마지막 9단이라면, 아마추어의 끝은, 프로가 되지 않은 한, 1급이었다. 요즘은 아마5단-1급도 흔하지만, 옛날에는 동네에 하나 둘 있을까 말까 했다. 기원에 가서 “1급 둔다”고 하면 손님들에게는 칙사 대접을 받았고, 원장님들은 기료를 받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고마워했다.
1급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1급이 되려면 꼭 익혀야 할 기본기를 구체적으로 콕 집어 주고 있다. 바둑TV 출판부, 신국판, 총 3권, 각 1만 4000원.
#3. <새 판을 짜라>
이 책은 바둑 실전, 특히 포석 단계의 ‘뉴 트렌드 중간보고서’ 같은 것. 바둑의 수법은, 특히 포석은 21세기가 시작된 이래 빠르게 큰 폭으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데, 이제 잠시 숨을 고르면서 뭐가, 어떻게, 왜 변했고 변하고 있는지, 정리를 한번 하 보고 가자는 것. ‘판’이란 포석을 말한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중국 기사들이 우리 기사들의 바둑을 검토하고 연구했다. 한국기원의 ‘바둑연감’이나 ‘충암 연구보고서’ 같은 것을 요새 스마트폰처럼 들고 다니면서 식당에서도 버스에서도 들여다보았다. 지금은 반대다. 우리 정예 멤버들이 ‘중국연감’을 구하려고 애를 쓴다. 누가 먼저 보느냐, 그게 성적에 관계가 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중의 판세가 중국 쪽으로 기울어진 것은 어린 중국 기사들의 공이다. 그들을 키운 중국 중견들의 공이기도 하다. 이 책의 목적은 그들이 공동연구로 만들어 내는 수많은, ‘새로운 초반’을 모아서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겠다는 것. 누가 더 자유롭고 창조적인 발상을 펼치는가.
<새 판을 짜라>는 이론만 따로 보여주는 책이 아니다. 이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초절정 고수들의 실전을 통해 보여준다. 기선 제압과 주도권 장악을 위해 처음부터 불꽃 튀겼던 바둑, ‘초반 열전(熱戰)’이라 명명하며 소개하고 있는데, 포석과 초반의 여러 모습들을 편의상 유형에 따라 수비형 공격형 삭감형 속독형 정석활용형 등 5개 부문으로 분류-정리하고, 실전보와 참고도를 같은 크기로 배치한 것이 돋보이는 구성이다.
편저자 이하림, 감수자 김일환 9단. 이하림 씨(55)는 바둑책 기획-편집 전문가. 성균관대 바둑 대표 선수였다. 졸업 후 잡지사 출판사를 거쳐 지금 20여 년째 바둑책에 매달리고 있다. 바둑책은 잘 안 나가는데도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끈질긴 사람이다. 도서출판 성안당, 신국판 352쪽, 1만 5000원.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