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찰청 전경.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초임은 서울지역 검찰청에 발령을 받았지만, 이후로는 지방과 수도권의 지청단위 일선을 전전했다. 처리하는 사건도 대부분 횡령이나 사기 사건 같은 고소·고발 사건이었다. 검사로서 거악을 척결하겠다는 포부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A 씨는 민생과 맞닿은 사건을 처리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라고 여기며 묵묵히 일을 처리했다. 하지만 A 씨에게 ‘중앙무대’에서 활약할 특별한 기회는 오지 않았고, 인사적체로 인해 부장검사 승진이 늦어지자 사표를 냈다.
비단 A 씨에 한정된 일이 아니다. 어느 조직에서나 그렇듯이, 법조계에도 ‘파벌’과 ‘주류’가 존재하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면 자괴감을 느껴 밀려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현직 검사 중 700명 이상은 서울대 출신이고, 절반 정도인 350여 명이 고려대, 200여 명은 연세대 출신이다. 검사 전체 정원이 1900여 명인 것을 감안하면 소위 말하는 ‘스카이대’ 출신이 아닌 학교 출신 검사들은 비주류에 속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법무부나 대검찰청처럼 검사들이 선호하는 근무지일수록 심화된다. 법무부에 일하는 검사 87명 중 51명, 대검찰청 63명 중 37명이 서울대 출신이다. 절반을 훌쩍 넘기는 수다.
학벌로만 파벌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검찰에서는 소위 잘나가는 ‘통’들이 따로 존재한다. 고소·고발 없이 수사를 기획하고 직접 정보를 얻어낸 뒤 수사를 하는 ‘특수통’, 선거범죄와 간첩사건 등을 처리할 수 있는 ‘공안통’은 대기업 수사를 하거나 유력 정치인들에게 칼끝을 겨누며 이름을 날릴 기회를 얻는다. 당연히 검찰 주요보직에 관한 인사에서는 이들이 유력 후보군을 형성하게 되고, 실제로 검찰 고위직을 꿰찬다. 수사와 무관하게 각종 정책에 관여하는 ‘기획통’도 존재한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와 직접 대면하는 형사부 검사들은 각종 ‘잡범’을 처리하지만, ‘형사통’이라는 말은 따로 붙이지 않는다. 검찰 내에서 주요 수사 부서에 들어가지 못한 대부분의 검사들이 여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검사들의 특성은 자연스레 파벌을 형성한다. 과거 한상대 검찰총장 시절 로스쿨 출신 검사가 피의자와 강제로 성관계를 하고, 서울고검 검사가 기업들로부터 억대의 금품을 수수하는 사건이 이어지면서 총장이 사퇴하는 결과가 빚어졌지만 그 이면에는 검찰 내부의 계파 갈등이 본질적인 부분이고 일련의 사건들은 촉매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고려대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 재임시절인 2011년 한상대 당시 서울고검장은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서울중앙지검장이 워낙 규모가 커 고등검찰청 검사장급 인사가 수장을 맡기는 하지만, 고등검찰청장이 지방검찰청장으로 내려가는 식의 인사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고려대 출신 기획통 한상대 지검장이 총장후보로 떠오른 것도 이때부터였다. 가장 사건이 많이 몰리는 중앙지검장을 맡겨야 총장에 임명할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2012년 말 당시 채동욱 차장(오른쪽)을 위시한 서울대 출신 특수통 검사들이 고려대 출신 한상대 총장의 사퇴를 종용하는 ‘검란사태’를 일으켰다. 일요신문 DB
서울대 법대 재학중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법무부 검찰과 검사, 대검 공보담당관을 지낸 차 검사장은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장검사, 대검 수사기획관을 거치며 확실한 ‘서울대 특수통 계보’를 이을 기대주로 각광받았다. 대검 수사기획관은 검찰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대검 중앙수사부의 수사를 기획하고 대외적으로는 공보업무를 맡는 보직으로, 검사장 승진 후 요직이 보장되는 자리다. 이후 대검 기획조정부장과 법무부 검찰국장, 대검 차장을 역임하며 자타가 공인하는 검찰총장 0순위 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의중은 이미 한상대 총장으로 기울어 있었고, 차 검사장은 서울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났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상대 총장 재임시절은 검찰에서 고려대 출신 검사들의 황금기였다. 한 총장은 취임직후 대검 주요 보직에 고려대 출신들을 등용했다. 대검 대변인에 처음으로 여성을 발탁하면서 고려대 출신의 박계현 부장검사를, 수사기획관에는 역시 고려대 출신의 이금로 부장검사를 임명했다.
고려대 법대 82학번 출신의 이진한 부장검사는 공안기획관으로 발탁됐다. 특수수사와 공안수사를 조립하는 자리에 나란히 고려대 출신 검사들이 기용된 것이다. 수원지검 안산지청 차장검사를 맡고 있던 김영진 부장검사는 한 총장에 의해 2012년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에 전격 발탁됐다. 대검 범죄정보과는 ‘검찰 내 국정원’으로 불리는 첩보수집기관으로, 대검 보직 중에서 부장급 검사가 맡을 수 있는 요직으로 꼽힌다. 당연히 서울대 출신의 ‘특수통’ 검사들은 절치부심할 수밖에 없었다.
검찰 내부에서 곪았던 계파간 갈등은 결국 대검 간부들이 한상대 총장에게 사퇴를 종용하는 ‘검란사태’로 이어졌고, 이 사건의 중심에는 채동욱 당시 대검차장과 최재경 대검 중수부장이 있었다. 채 차장과 최 중수부장은 나란히 사법연수원 14기와 17기를 대표하는 ‘특수통’ 검사로, 서울대-특수통 계파를 이끌던 주역들이었다.
잇따른 검사비리가 터지자 채 차장은 대검 간부회의에서 한 총장의 사퇴를 종용하며 총대를 멨고 한 총장은 최재경 중수부장을 감찰하겠다고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한 총장은 계파싸움에서 밀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퇴진했고, 후임으로 채동욱 총장이 부임했다. 검란사태 막판 한 총장과 대립각을 세우며 사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됐던 최재경 중수부장 역시 살아남아 현재 인천지검장을 맡고 있다.
현재 재임중인 김진태 총장 역시 서울대 출신에 특수통 검사로 출신이지만, 경남 진주 출신으로 동향 검사들을 중용하고 있다. 강찬우 대검 반부패부장이 대표적이다. 81년 진주고를 졸업해 서울대 법대를 거쳐 검사에 임관한 강 부장은 현직 검사가 사건 청탁 대가로 건설업자로부터 승용차 등을 받아 문제가 됐던 이른바 ‘그랜저 검사’ 사건에서 특임검사를 맡으며 이름을 알렸다.
대검 반부패부는 중앙수사부 폐지 이후 대체된 기관으로, 특별수사를 총체적으로 지휘하는 기능을 맡는다. 직접 대형사건을 처리하던 중수부 시절보다는 못하지만 검찰 특수수사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다. 게다가 첫 신설된 기관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끌고 있다.
역시 진주고 출신의 허철호 부장검사도 대검 간부로 발탁됐다. 현재 대검 국제협력단장을 맡고 있는 허 부장검사는 2009년 대검 마약과장으로 재직했으나, 이후 일선 형사부를 떠돌다가 김 총장 취임 이후 대검에 재 입성했다. 국가 간 사법공조를 총괄하는 대검 국제협력단장은 최근 불거진 ‘증거조작사건’으로 중국과의 사법공조가 주목받으며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진주 동명고 출신의 강백신 검사는 이번에 처음 대검 연구관으로 기용되며 처음으로 중앙무대에 섰다.
서울 출신에 서울중위권 대학을 나온 한 부장검사는 이런 현실을 두고 “나와는 동떨어진 현실감 없는 이야기”라고 토로한다. 이 부장검사는 “이번에 김진태 총장이 들어서면서 소위 잘나가는 특수부 검사들이 줄줄이 지방 형사부로 내려가고 지방 검사들은 서울지역으로 대거 올라왔는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며 “검사들의 인사권이 청와대와 법무부에 있는 이상 줄서기 문화가 없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선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