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4년 10월 19일 한국-프랑스 간 원자력협력협정이 체결되면서 ‘박정희 핵 프로젝트’의 서막이 올랐다. 핵 개발을 위해서는 우라늄 농축을 통한 핵연료 제조부터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까지를 총망라한 핵연료 주기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당시 프랑스는 우리나라와의 원자력 사업을 최우선 국책사업으로 선정해 우리 대표단에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시설까지 자세하게 안내하는 등 시작은 순조로웠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실현하기 위한 궁극적인 해결책이 핵무기 개발에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핵무기는 파괴력에 있어 재래식 무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하고, 북한이 기습공격을 감행해올 경우 핵무장을 통해 북한의 존립 자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기에 자주국방의 완성이 여기에 있다고 봤다.
이 무렵 우리나라는 핵무기 개발에 있어 북한보다 적어도 7~8년 앞서 있었다. 북한의 또 다른 기습남침을 억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북한보다 먼저 핵 개발을 완료하는 것이 필요했다.
특히 미국의 핵 보호를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핵무기 개발은 더욱 필요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국내외 정보망을 통해 북한의 핵 개발 동향을 자세히 파악하고 진척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핵 개발 과업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해 나갔다.
이후에도 미국은 우리 정부의 핵연료 재처리시설 도입을 포기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압력수단을 동원했다. 원자력 발전소 연료 공급을 중단하겠다, 수출입 규제 등 경제제재를 하겠다, 국군현대화계획과 방위산업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 급기야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경제·군사·과학기술 등 우리나라의 국운과 직결된 분야에서 협력관계를 모두 끊어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망하지 않으려면 재처리시설 도입을 포기하라는 최후통첩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의 위협이 현실화된다면 우리나라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국방의 기치 아래 각종 무기를 생산하고 있는 창원 공업기지의 방위산업체를 시찰하는 모습. 연합뉴스
결국 박 대통령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실제 핵무기를 보유하기까지 족히 5~6년이 걸리므로 그 전에 주한미군이 철수해버리면 한반도의 세력균형이 무너지면서 우리의 국가안보는 중대한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다. 더욱이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한반도를 적화통일 할 수 있다고 망상하는 북한의 전면도발 가능성이 그만큼 커질 것이 자명했다. 1976년 1월 26일, 박 대통령은 프랑스와의 핵연료 재처리시설 도입 계약을 파기했다.
미국 내 정세도 박 대통령의 편이 아니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퇴한 후 대통령선거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 위해 인권외교와 함께 주한미군 철수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1976년 미 대선 때 카터는 한국 정부의 인권침해는 매우 불쾌한 일이며, 한국의 불량한 인권상황이 미국의 공약에 대한 미 국민의 지지를 약화시키고 있다며 주한 미 지상군 철수계획을 발표했다. 카터는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행정부로 하여금 구체적인 철군 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카터 대통령은 미 지상군 철수가 순전히 군사적인 결정이라고 단언했지만 그는 철군 문제를 우리나라의 인권신장 문제와 연계시키고 있었다. 즉 한국의 인권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고 군사원조를 계속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며, 따라서 인권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한국군 전력증강계획에 대한 지원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의 대응은 기민하고 단호했다. 1977년 3월,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정부·여당 연석회의를 주재했다. 주한미군 철수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와 결의에 관해 의견을 조율하기 위한 회동이었다. 각 부처 보고가 끝나자 박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이 철수 문제를 우리와 협의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에 불쾌감을 표명했다. 여당의 한 중진은 야당과 언론에서 문제가 생겼는데 왜 정부 방침을 안 밝히느냐, 국회는 왜 안 여느냐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박 대통령은 이렇게 지시하기도 했다.
“국회를 열어서 정부 입장을 당당히 밝히세요. 외무부는 주한 미 대사가 오면 4년이니 5년이니 하는 소리 말고 당장 미국의 계획을 밝히라고 요구해요. 특히 하비브(미 국무차관)란 사람이 인권문제 운운한 것은 우리를 얕보고 하는 소리 같은데 4년 내에 마지막 부대가 떠나달라는 것만 얘기하고 구차하게 호소하는 따위의 말은 하지 마세요. 정부나 여당이나 야당이나 딱 떨어지게 말해야 합니다.”
박 대통령은 이후에도 미국에 철군 전 보완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뒤이어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카터와 담판을 지었다. 결국 1979년 7월 브레진스키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은 군사정세가 재평가될 1981년까지 주한미군의 철수를 보류한다는 카터 대통령의 결정을 공식 발표했다.
미국은 이후 핵 개발이 자연스럽게 저지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힘에 대한 과신이자 오만에서 나온 속단이었다. 한미 간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줄다리기 외교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은 핵 프로젝트를 멈추지 않았고 곧바로 괄목할 만한 첫 번째 결과물을 세상에 내놨다. ‘백곰’을 쏘아 올린 것이다.
1979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 환영행사. 미국은 한국의 핵개발을 포기시키기 위해 ‘주한미군 철수’ 카드로 압박했다. 연합뉴스
1978년 9월 26일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진은 프랑스의 기술 지원으로 개발한 사정거리 180㎞의 지대지 유도탄 백곰을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7번째로 미사일 보유국이 됐다. 앞으로 핵폭탄을 만들게 된다면 이것을 발사할 수 있는 ‘운반수단’을 보유하게 된 셈이었다. 이 무렵 외신들은 한국을 ‘잠재적인 핵보유 국가’로 분류해 보도하기도 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이 완료되는 1982년에는 은퇴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1982년은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완료돼 본격적인 중화학공업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시기였다. 이와 함께 핵무기를 개발·보유하게 되면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 추진해온 자립경제와 자주국방 건설이 완성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이때야말로 자신이 은퇴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는 임기가 끝나기 전 적절한 시기에 10월 유신으로 창출된 위기정부체제를 민주주의체제로 대체하는 개헌안을 국민투표로 확정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유신헌법은 대통령 잔여임기가 1년 미만일 때는 보궐선거를 하지 않고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박 대통령은 은퇴시기를 남은 임기가 1년이 안 되는 시점에 맞춰 국무총리가 권한대행을 맡도록 하고, 그 기간에 거국 내각을 구성하여 개정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해 새 정부를 탄생시키는 산파역할을 수행할 구상이었다.
1975년 4월 베트남이 공산화된 이후 박 대통령은 큰딸인 근혜에게 이런 말을 했다.
“북한은 베트콩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국가의 지도자는 나라가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는 다른 문제로 비판을 받더라도 나라부터 구해놓고 봐야 한다. 경제발전과 자주국방만 이룩해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말려도 내가 알아서 물러날 텐데 왜 기다려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런가하면 박 대통령은 1979년 1월 1일 해운대에 내려가 새해 구상 중 청와대 공보비서관을 지내다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나간 선우연을 불러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1983년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식 행사 때 핵무기를 공개한 뒤 그 자리에서 은퇴를 선언할 생각입니다. 김일성이 우리가 핵무기를 보유한 것을 알면 절대로 남침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꿈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측근에게 구상을 밝힌 9개월여 뒤 박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아 급서했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