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기사 특정내용과 관계없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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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이나 비디오방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지난해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와 2003년 마지막 날인 12월31일, 신년 1월1일 대학가 일대 러브호텔 카운터에서 업주와 고객이 나누는 대화다.
이미 지난해부터 대학가 러브호텔은 대학생 커플들의 주 데이트 장소로 급부상했다. 주말 혹은 중간·기말 고사 때면 으레 러브호텔 객실은 대학생 커플로 붐볐다.
하지만 영화나 콘서트 등 각종 이벤트나 공연이 집중된 연말연시에 대학가 러브호텔이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지난 12월24일에 이어, 2003년 마지막 날에도 러브호텔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일요신문>은 지난 12월31일 신촌을 비롯해 강남, 혜화동, 건국대 입구 등 서울 시내 대학가 러브호텔촌 현장을 찾아가 봤다.
오후 3시 신촌. 날씨가 쌀쌀해지고 비가 보슬보슬 내리자 신촌 지하철역 부근 서대문구 창전동 러브호텔촌에는 하나둘씩 대학생 커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근 패스트푸드점에서 먹거리를 한아름 사들은 한 커플. 남자친구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학생.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주변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남학생….
뒤따라오던 또 다른 커플. 남학생은 골목길에 지나가는 행인이 없자 살며시 여자친구의 손을 잡아끌고 러브호텔 입구로 들어섰다. 일찌감치 영화관이나 콘서트 혹은 패밀리레스토랑에 가기를 포기한 듯한 모습이다.
그 순간 인근 러브호텔에서는 한 커플이 빈 방을 잡지 못하고 입구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엉겁결에 마주친 커플들은 쑥스러운 듯 본능적으로 입을 가렸다.
커플들이 자주 찾는 신촌 지역 러브호텔은 골목에 위치하고 있지 않다. 주로 행인들이 다니지 않는 건물과 건물 사이로 뻗은 좁은 골목을 끼고 밀집해 있다. 러브호텔들은 주변 ‘지형지물’에 적절하게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주위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대학생 커플들에게는 안성맞춤이다.
실제 도로변이 아닌, 주택가나 밀집 건물 사이에 위치한 P모텔이나, A호텔 객실은 이미 오전에 꽉 차 있었다. 기자가 찾은 J모텔도 두 커플이 30분 이상 방이 빠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
기자는 I모텔에 들어서는 한 커플과 어렵게 인터뷰했다. A대학 3학년 동갑내기 커플이었다. 남자친구 K씨는 1주일에 두 번은 러브호텔을 찾는다고. K씨는 “연애 2년째인데 이미 가볼 곳은 다 가봤다. 괜히 이리저리 다니며 돈 쓰는 것보다 단돈 2만원으로 호텔 안에서 영화 보고 한 숨 자는 게 훨씬 경제적”이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러브호텔 마니아였다.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한 이날 오후 5시30분. 종로구 대학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2003년 마지막 날을 즐기려는 인파들로 4호선 혜화역 일대가 시끌벅적했다. 이미 길 건너편 마로니에 공원 부근도 각종 공연이 펼쳐지는 터라 발을 디딜 틈조차 없다.
상대적으로 성균관대 입구나 돈암동 방향의 마로니에 공원 부근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기려는 커플들이 눈에 띈다. 바로 이곳은 러브호텔이 몰려 있는 지역.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들어 몇몇 러브호텔을 바라보니, 객실 대부분에 전등이 켜져 있다.
B호텔 측은 “쉬어 가는 손님만을 받고 있는데 방이 없다. 신촌처럼 학기 중에 찾는 커플들이 많지는 않지만 요즘과 같은 연말연시에는 객실이 만원이다”고 말했다.
서울대가 위치한 봉천동 부근이나 건국대 입구역, 강남역,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부근의 러브호텔은 오히려 대낮보다 저녁이나 심야 시간대에 손님이 몰렸다. 저녁 9∼10시대가 절정을 이뤘다.
이곳 일대를 찾는 커플 대다수가 술을 즐기기 때문이다. 신촌이나 대학로 부근은 미리 작정을 한 ‘숏 타임’커플이 주 손님이라면 이곳은 아예 하룻밤을 보내겠다고 하는 커플이다.
최근 대학가의 러브호텔이 인기 상승중인 이유는 무엇보다 비용이 저렴하다는 데에 있다. 꽁꽁 얼어붙은 경제 탓에 주머니 사정이 얇아진 게 가장 큰 이유.
비록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는 업소들이 기존 요금의 40∼50%를 올려 받기도 하지만 대체로 2만원 내외로 편안하게 이성친구와 쉬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선호도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여타 다른 여가 시설 이용비나 외식비용이 껑충 뛴 탓도 러브호텔이 반사이익을 얻는 이유 중 하나. 이 때문에 ‘같은 값이면 러브호텔이 낫다’는 생각이 어느새 신세대 사이에서 보편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