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대장금>의 한상궁 모델로 알려진 마지막 주방상궁 한희순씨. 그는 무형문화재 지정 1년 만인 72년 타계했지만 그의 궁중요리 솜씨는 직계 제자 황혜성 궁중음식연구원 이사장과 숙명여대 제자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신선로를 만드는 모습. | ||
이런 현상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음식 관련 각종 인터넷 사이트는 궁중음식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보려는 네티즌들이 넘쳐나고 있다. 각종 요리 학원이나 음식 연구원은 궁중음식 만드는 법을 배워보려는 수강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대장금>은 궁중음식에 대한 고정 관념을 완전히 깼다. 햄버거, 피자 등 패스트푸드에 익숙한 신세대까지 자연스럽게 궁중음식 전문점을 드나들 정도로 ‘궁중음식’은 어느새 친숙한 단어가 돼버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드라마 <대장금>이 주인공 장금과 주방상궁들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면서 주방상궁의 역할과 그 명맥에 대해 관심을 표출하는 팬들도 적잖다.
특히 조선시대 마지막 주방상궁이자, 국내 최고의 궁중음식 전문가들에게 국보급 기술을 전수한 한희순 상궁은 지난 1월5일 작고 22주기를 맞아 다시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 상궁은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의 스승 역할을 맡은 ‘한상궁’의 모델로도 알려져 있다.
<일요신문>은 국내 유일한 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2대 기능보유자 황혜성 궁중음식연구원 이사장과 큰딸인 한복려 궁중음식연구원 원장, 그리고 한 상궁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 한춘남씨를 통해 조선 궁중음식의 마지막 원류인 한희순 여사의 일생과 그녀가 남긴 발자취를 재조명했다.
한희순 상궁은 1889년 서울 왕십리에서 농사를 짓던 한만희씨의 큰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가사일을 돌보면서 손수 아버지의 식사를 준비할 정도로 음식만들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유난히도 흰 피부와 후덕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 가족은 물론, 같은 동네 사람들에게도 늘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한 상궁이 궁에 들어간 것은 고종 27년인 1901년이었다.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에 주방 내인으로 입궁한 것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열 두 살이었다. 나이로만 따지면 아기 나인격이었다. 당시에는 중인층의 딸이 나이가 든 상궁들의 추천으로 입궁하는 사례가 많았다. 한 상궁도 꼼꼼한 성격과 정갈한 음식솜씨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노(老) 상궁의 추천으로 궐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한 상궁은 소주방에서 일을 시작했다. 소주방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수라간을 의미한다. 소주방은 왕과 왕비의 조석상을 차리는 안소주방과 궐내의 크고 작은 잔치나 고위 관료들의 생일상, 그리고 차례, 고사 등을 담당하는 밖소주방으로 나뉜다. 막내 궁녀였던 한 상궁은 음식상 차리는 일은 하지 않고 음식재료를 다듬고 설거지를 하거나 대궐에 불 밝히는 일을 도맡았다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견습생이었던 셈이다.
경운궁 내에서 잔심부름만을 도맡아하던 한 상궁은 특유의 성실한 자세가 주방상궁에게 눈에 띄어 고종의 수라상을 차리는 일을 맡게 된다. 찬이 무려 스물세 가지나 되는 까다로운 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실수 한 번 없이 수라상을 차려 냈다고 한다.
황혜성 이사장이 펴낸 수필집 <열두첩 수라상으로 차린 세월>에서도 “당시 한 상궁은 수라상을 차리는 다양한 방법을 2년 만에 완전히 익혔다”고 소개할 정도였다.
그러던 그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부터는 고종은 물론, 순종의 수라상도 도맡아 차렸다. 한국전쟁 이후 한 상궁으로부터 음식 기술을 전수받은 제자들은 고종과 순종의 식습관과 성격을 세세하게 알 수 있었다고 한다.
▲ 60년대 TV에 출연한 한희순 상궁(왼쪽)과 수제자 황혜성씨. 아래 사진은 장독대를 살피는 황혜성씨. | ||
한 상궁이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1922년 무렵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 상궁은 고종이 승하한 뒤에도 상복을 입고 금곡릉에서 삼년상을 치러냈다.
‘한 번 상궁은 영원한 상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한 상궁에게 잘 어울릴 법하다. 고종의 삼년상이 끝난 뒤 국가에서 대전 소속의 궁녀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었으나 한 상궁은 궁궐을 나오지 않았다. 그때 대부분 궁녀들은 궁을 나와 출가를 했으나 한 상궁은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지극한 충성심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한 상궁은 낙선재에서 순종과 윤비를 모셨다. 한 상궁은 특히 황후 윤비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순종이 1910년 일제에 의해 폐위되고 1926년 승하한 뒤 서서히 기력을 잃어 가는 윤비에게는 한 상궁이 벗이자 어머니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한 상궁이 정식 주방상궁이 된 시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기 3개월 전 한 상궁이 수라간 궁녀 중 가장 적은 축에 속한 54원의 월급을 받았다는 기록과 3∼4년 후 궁녀들이 대거 궐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설’을 감안한다면 1930년 무렵, 주방상궁으로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
한 상궁은 제자들에게서 ‘음식의 신’으로 통했다. 궁중음식은 물론, 아이스크림이나 수프 등 양식상도 잘 차렸다고 전한다. 임금과 왕비가 입맛이 없을 때면 신기하게도 그 입맛을 다시 돋우게 하는 재주도 있었다고 한다.
황혜성 이사장은 저서에서 “한 상궁은 새벽녘에야 잠드는 고종에게는 야참으로 설렁탕과 동치미를 부은 냉면을, 음식을 가리고 치아와 위장이 좋지 않았던 순종에게는 차돌박이를 푹 고아 뭉쳐 조린 차돌조리개와 쇠고기 채를 썰어 거기에 고명을 넣고 볶아 끓인 황볶이탕을 올렸다. 또 윤비가 입맛이 없을 때에는 낙선재 배춧잎에 조기젓국과 새우젓국으로 간을 맞춘 섞박지 김치와, 불은 팥을 삶고 그 물을 받아 지은 밥을 지어 올렸다”고 전했다.
맛을 직감하는 혀의 감각도 당대 최고라는 평이다. 황 이사장은 자신의 수필집에서 “세상에서 어떤 음식이라도 한 번 맛을 보면 양념이 무엇이고, 양이 얼마만큼 들어갔는지 족집게처럼 집어냈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 상궁은 궁녀였지만 때로는 엄하고도 자상한 스승이었다. 한 상궁은 순종이 승하하고 궐내의 궁녀 처소가 전부 폐쇄되자 현재 풍문여고 뒤쪽에 위치한 안국동 별궁에서 생활하며 세 명의 수라간 궁녀와 학생들에게 궁중음식을 전수했다.
그의 교육은 엄하고 꼼꼼하게 진행됐다. 특히 음식 조리에 있어서 정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포를 햇볕에 말릴 때 파리가 포에 올라오지 않도록 하루종일 부채를 든 궁녀를 포 옆에서 지키게 할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는 한 상궁의 유일한 친족인 조카 한춘남씨(78)의 말처럼.
음식을 배우는 궁녀들은 한 상궁 앞에서 눈을 깔고 재빠르게 행동해야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외부에서 교육을 받으러 온 학생들에게는 깍듯이 존대를 했으며, 궁녀들을 위해 먹거리를 마련해 주는 자상한 면을 보여주기도 한 스승이었다.
50년대 중반부터 한 상궁은 숙명여대에서 궁중음식 강사로 일했다. 한 상궁으로부터 궁중음식을 전수받은 황혜성 이사장이 숙명여대에 추천한 것이었다.
황 이사장은 한 상궁의 직계 제자로서 현재 궁중음식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일본 교토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황 이사장은 1942년 숙명여전(현 숙명여대)의 오다 쇼고 교장의 소개로 처음 낙선재에 들어가 한 상궁으로부터 궁중 음식을 전수받았다.
황 이사장은 1941년부터 숙명여전(현 숙명여대) 조교수를 시작으로, 1946년에는 숙명여대 교수, 1959년에는 명지대 전신인 서울문리사범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지난해 1월26일 숨을 거둔 염초애 전 숙명여대 가정대 학장 및 한국음식문화연구소 소장도 한 상궁으로부터 궁중음식을 전수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염 전 학장은 1955년부터 학생과 대학 조교 신분으로 한 상궁에게 궁중음식을 전수받았다.
조선 마지막 주방상궁의 역할이 끝나는 시점은 1966년 2월3일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과 1960년 4·19를 겪으며 낙조의 왕궁을 지키던 윤비가 결국 낙선재에서 운명을 달리한 것이었다.
▲ 한희순 주방상궁이 ‘성장’을 갖춘 모습. | ||
66년간의 궁녀 소임을 접은 한 상궁은 낙선재를 나와 고향 왕십리로 향했다고 한다. 그녀가 기거한 곳은 친정 조카집이었다. 당시 한양대 가정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황 이사장은 효창동에서 학교 근처 행당동으로 이사해 좀더 가까운 곳에서 한 상궁으로부터 궁중음식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자매 요리전문가로 유명한 황 이사장의 두 딸 한복려, 복선 자매도 한 상궁에게 궁중 음식의 ‘맛’을 배웠다.
한 상궁이 81세 때인 1970년. 1964년부터 연극, 음악, 무용, 공예 기술 분야에서 무형문화재를 지정해온 정부는 궁중음식 기능보유자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하고 12월24일 문화재 위원회 본 회의에 안건을 상정했다. 예상대로 안건은 무난하게 통과되고, 1966년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의 황후 윤비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수라간을 지킨 한 상궁은 1971년 1월6일 중요무형문화재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 1호로 지정됐다.
기능보유자는 한 상궁 혼자가 아니었다. 당시 정부는 한 상궁 외에 기능보유자로 3명을 추가 지정했다. 한 상궁과 함께 조선왕조 마지막 상궁이었던 김명길, 박창복, 성옥염 등 네 사람이 선정됐다. 그러나 1971년 12월24일 한 상궁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재평가 심의를 통해 보유자 인정이 해제됐다.
사실 김명길, 박창복, 성옥염 상궁은 전문 주방상궁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주 주방에 들어가야 했다. 궁녀들이 거의 없었고, 6·25전란 등으로 이곳 저곳을 옮겨다녀야 했기 때문에 이들도 마지막 황후 윤비를 위해서 주방 궁녀로서의 역할도 했다.
한 상궁은 공교롭게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은 지 꼭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1972년 1월5일 새벽 네 시의 일이었다. 가족은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지만 그 전에 작고한 상황. 남동생의 아들인 한춘남씨가 유일한 혈육이었다.
한 상궁은 그날 거처하던 방에서 궁중 비단 저고리를 입고 고종과 순종의 사진, 그리고 윤비의 능을 향해 삼배 한 뒤 염불을 외우며 눈을 감았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마지막 주방상궁이 추억의 저편으로 지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뒤를 이어 이듬해 11월 황 이사장이 2대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세월이 지나 2004년. 그렇게도 궁중음식 문화 보급에 열성이던 황 이사장은 84세의 나이 탓인지 최근 건강이 악화돼 막내아들 집과 병원을 오가며 외출을 삼가고 있다.
궁중음식의 명맥을 잇는 인물은 황 이사장의 세 딸이다. 큰딸 한복려씨는 궁중음식연구원 원장이며 이미 1990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 후보에 올라와 있다.
특히 <대장금>에서 등장하는 각종 궁중음식의 고증을 담당하고 있다. 둘째딸 한복선씨도 요리 연구가로 활동하며 각종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막내 한복진씨도 현재 전주대학교 문화관광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주방상궁의 역사는 끝나지 않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