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에도 살인사건의 경우엔 그림까지 첨부한 과학적인 검시보고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 ||
서울대 규장각 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시대 후기 사건 보고서가 공개됐다. 문화콘텐츠연구원과 문화콘텐츠 마케팅 에이전시인 (주)엠에이컴은 지난 5월3일 이두한자로 기록된 조선 후기 사건 보고서를 우리말로 해석한 번역본 중 그 일부를 공개했다.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5백40점의 보고서 중 이번에 번역된 사건 보고서는 50점. 이중 사건 제목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엽기사건 세 편을 발췌해 정리했다.
아들 잃은 아버지의 복수
서기 1900년 11월. 전라남도 남원군 남생면에서는 끔찍한 보복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여섯 살 난 아들이 같은 동네에 사는 40대 남자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자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범인을 처참하게 보복 살해한 것이다.
시작은 문둥병에 걸린 이여광씨가 김판술의 자제인 왜춘을 꾀어 배를 가르고 간을 빼먹은 것이었다. 아우 군필에게서 어린 아이의 간이 문둥병에 효험이 있다는 말을 줄곧 들어온 이씨가 11월9일 자신의 논에서 놀고 있던 왜춘을 산으로 유인,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 사건은 곧 연쇄적인 죽음을 불러왔다. 우선 아들의 죽음에 분개한 김씨가 이씨를 칼로 살해했다. 김씨는 이씨의 집을 찾아 이씨의 친동생인 이군필과 사촌동생 이판용이 보는 앞에서 이씨가 아들을 죽일 때 사용하던 같은 칼로 이씨의 배를 가른 것. 곧바로 김씨는 이씨의 배에서 아들의 간을 찾아내 이씨의 동생들에게 확인까지 시켰다. 이군필과 이판용도 문둥병 환자였다.
이 충격으로 이군필은 형이 살해당한 지 3일 만에 소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으며, 오래 전부터 병을 앓아온 이판용도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하다 숨졌다.
특히 이 사건은 자칫 미제 사건으로 남을 뻔했다. 김씨와 이씨의 두 가족과 동네 주민들의 모종의 합의를 보고 사건을 감추려고 했던 것. 조사 결과 사건 당일 두 가족이 모두 모여 “살인한 자가 죽었으니 더 이상 일을 확대할 필요가 없으므로 피차간에 합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한 후 주민들로 하여금 시신을 몰래 매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양 집안이 한 번씩 주고받은 일이니 관가에 고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서로간의 합의서를 주고받은 셈.
당시 사건 조사관으로 임명된 남원 군수 권직상은 이 같은 내용을 사건 보고서 첫 머리에 기록했다.
권직상은 2차, 3차까지 심문 조사를 벌였다. 사건 발생 뒤 목을 매 숨진 이여광의 아우 이군필과 이판용에 대한 죽음과 김씨의 연관성을 밝혀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1차 조사와 마찬가지로 두 아우의 사인이 자살과 병사로 밝혀지자 사건을 종결시킨 뒤 관련자들을 옥에 가두고 명단을 기록해 상부에 전달했다. 현재 검찰이 범죄자들을 구치소에 구속시킨 뒤 구형을 내리고 법원의 처분을 기다리는 절차와 흡사하다.
권직상은 사건 보고서의 마지막 발사(跋辭)에서 “김판술에 대해 비록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보복 행위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먼저 법률에 호소해야 함에도 사사로이 살인을 저질렀으니 법에 의거 처벌돼야 마땅하다”고 밝혔다.
이와 더불어 이여광의 삼촌인 이우범도 사건 은폐 책임을 물었으며 , 방장(坊長, 현재의 구청장이나 동장)으로서 상부 고발 책임을 망각하고 두 가족의 합의서에 서명한 방채규도 처벌 대상 명단에 올렸다.
친정어머니의 딸 죽이기
1901년도에는 강원도 양구군에서 끔찍한 가족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고된 시집살이를 겪던 며느리가 시댁과의 관계를 끊기 위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남편을 허리띠로 목 졸라 죽였고, 친정으로 쫓겨난 며느리도 도리어 친정어머니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사건은 9월18일 양구군 해안면 오류동에서 일어났다. 15세의 김암회라는 남자가 아내인 김여인에 의해 목이 졸려 사망한 채 발견된 것. 이 사건은 아들의 시신을 발견한 아버지 김우여가 마을의 행정 책임자인 동임(洞任)에게 이같은 사실을 털어놓은 뒤에서야 상부에 보고됐다.
김씨가 털어놓은 내용은 이렇다. 한밤중 바깥사랑채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처가 “며느리 방에서 변고가 일어난 듯하다”고 깨워 곧바로 며느리 방에 가보니 아들이 죽어 있었다는 것.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뒤 통곡을 하며 며느리를 심문했더니 며느리가 “남편을 죽이면 시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며느리를 죽이고 싶었지만 정을 생각해 친정으로 보내기로 결심하고 친정어머니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을 죽인 딸을 용서할 수 없었던 친정어머니는 9월19일 딸을 집으로 데려가던 도중 만대동에서 동아줄로 딸을 목 졸라 죽이고 길가에 버렸다고 시댁에 통보해왔다는 것이다.
동임 김순형은 이 내용을 9월22일 면 집강소(치안담당기관)에 보고하고, 집강소 책임자인 김홍석이 향소(군·현 수령의 보좌기관)에 알렸다.
조정의 관계자 심문이 실시된 것은 11월10일. 사건 발생 두 달이 지나서야 조정에 보고된 것이다.
조정이 양구군 오류동에서 김여인과 남편 김암회가 살해당한 내용과 시친(시체의 친인척으로 사건 고발의 주체)인 아버지 김우여가 검시를 면해달라고 청한 보고를 받은 것은 11월8일 술시(오후 7시~9시)였다.
조사관은 11월9일 인제군 논장리에서 저쪽으로 20리쯤에서 김여인, 그리고 오류동에서 김암회의 무덤을 파 시신을 검시했다.
이 과정에서 9월19일 어머니에게 살해당해 길가에 버려졌던 김여인은 다음날 친정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김명동에 의해 땅에 묻힌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관은 사건 보고서 말미 발사(跋辭)에서 “상부에서 가족들이 검시를 면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시체 검시 후 보고서를 갖추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며 시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첨부했다.
‘김암회의 전신 위 아래는 달리 손상된 흔적이 없다. 양 턱과 목 부위의 액흔(목 맨 흔적)은 한 곳 있다. 눈은 뜨고 혀는 말려 있었고, 입에서 먹은 것이 나왔으며 이마는 꺼지고 대변이 나와 있었다’, ‘김여인은 몸에는 별다른 상흔이 없으며 양 턱에 목 졸린 흔적이 비스듬했는데 길이가 2촌이고 색은 자암색이다. 눈은 뜨고 혀는 말려 있었다’
조사관인 양구군수 서리 겸 춘천군수 김영규는 김암회의 부친 김우여와 모친, 그리고 며느리 어머니, 머슴 김명동을 사령방에 가두었다.
그리고 사후 보고 책임이 있는 집강 김홍석, 동임 김순형 등과 김암회의 죽음을 전보한 이봉기 등은 죄가 미약하므로 잠시 석방한다고 결정했다. 이와 함께 조사관은 사건 보고서에 시신의 위치를 표시한 후 군인으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다는 내용을 기재했으며 목을 조른 끈은 찾지 못해 그림으로 첨부해 상부로 송부했다.
▲ 조선 후기에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엽기적인 사건이 종종 벌어졌다. 사진은 <스캔들>의 배용준. | ||
엽기적이지는 않지만 주목할 만한 사건이 하나 있다. 올해 발생한 안상영 부산시장, 박태영 전남도지사의 자살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때에도 고위 관료가 자신의 비위 사실문제로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때는 1906년 8월29일. 황해도 서흥군수 최동식이 잠을 자던 중 그대로 숨을 거뒀다. 사망하기 직전 최 군수는 체온이 높았고, 손을 떠는 등 병세를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향장(조선시대 향청의 우두머리) 문정순과 통인(수령 아래서 잔심부름 하던 하급 서리) 오영창 등은 지병 때문에 군수가 세상을 떠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군수를 진찰하던 의원은 사인을 화증으로 내렸다.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하던 최 군수가 차라리 세상을 떠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했으며, 그로 인해 자연히 몸이 경직됐다고 본 것이었다.
그 예측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실제 최 군수의 이부자리에서 최 군수가 죽음을 예감하며 직접 쓴 유서가 발견됐다.
유서에는 ‘시국에 대해 생각하니 다만 통곡하고 유감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내가 본래 용렬하고 우매하여 살아도 세상에 이익이 될 것이 없고 죽어도 나라에 손해가 될 것이 없으니 살고 죽는 것에 경중이 없다. 그러나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스스로 금할 수 없고 세상을 보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해 이제 이와 같이 하련다. 괜히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지 말 것이며, 시신도 드러내 검험(부검)하지 말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자살을 암시해주고 있던 것이었다.
최 군수의 가족들도 유서를 접한 뒤로는 최 군수의 죽음에 대해 별다른 의혹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최 군수가 시국을 개탄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 여겼다. 당시 정국은 조선을 장악하려는 일본에 맞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평해 군수 강재천도 군수직을 버리고 의병을 일으킬 때였다.
가족들은 검시를 하지 말라는 최 군수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선산에 매장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내부(지금의 행정자치부)에서 검시를 하겠다며 서흥 군수의 시신을 서서(西署, 현재 서울의 서부를 관할하는 경찰서)로 옮기라고 명했다.
당시 최 군수 자살 사건의 조사를 맡던 황해도 관찰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서흥 군수의 시신이 서울로 이송된 후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서흥 군수가 세금으로 거둔 공금으로 쌀 무역을 하다 무려 6만냥을 손해보고 이를 비관해 자살했다는 소문이었다.
과연 진실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돼 있지 않다. 최 군수의 시신이 서울로 이송된 후에는 아무런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황해도 관찰사는 일본 정부가 최 군수의 죽음을 악의적으로 몰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편 이같은 사건 이외에도 병으로 사망한 조카의 사인을 조카 부인과 정부가 공모해 독살한 것으로 바꿔 정부의 재산을 노린 사건(1894년 충청도 환간현 남면 신평리 음작용 사건), 부인의 외도를 감시하기 위해 고용한 옆집 이웃 남자가 자신의 부인과 도리어 바람을 피우자 남편이 부인과 이웃 남자를 모조리 죽인 사건(1895년 10월)의 보고서도 우리말로 해석됐다.
놀라운 것은 당시에도 객관적 물증에 의한 사실 확인이 선행된 후 보고서 작성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살인 사건의 경우, 필히 사체 검시 및 부검 내용을 보고서에 세세히 기록했다. 또 조사관 역할을 맡은 군수는 사건 관련자, 친인척 등 최소 20여명 이상을 불러 세세히 문답한 내용을 조사 보고서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조사는 필히 두 번 이상 실시하였으며, 조사관으로 파견된 사건 발생 지역 군수와 인근 지역 군수 간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세 번, 네 번까지 조사를 진행한 점이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