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헌 전 육사교장 | ||
그렇다고 김씨가 최근 심한 생활고를 겪거나 불치병으로 비관하던 상태도 아니어서 그의 죽음은 주위에서 하나의 미스터리로 얘기되고 있다. 과연 그가 막다른 선택을 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유가족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17일 오후 3시께 금융 소득 등에 대한 종합소득세를 신고하기 위해 용인세무서로 나간 뒤 연락이 끊겼다. 그후 김씨가 발견된 것은 다음날인 18일 오후 12시30분께 경기도 분당의 N모텔 객실. 당시 김씨는 화장대 위에 짤막한 유서를 남겨놓고 속옷 차림으로 화장실 문에 목을 맨 상태였다.
김씨의 부인은 “대통령 탄핵심판 후 부쩍 말수가 줄어들었고 많이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이렇게 자살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김씨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평소 나라 걱정을 많이 했지만 이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아직도 아버지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김씨가 가족들에게도 털어놓기 어려운 사건이나 시비에 휘말렸던 게 아니냐는 시각도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김씨가 평소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인 데다 오래전부터 가톨릭에 귀의해 독실한 신앙생활을 해왔다는 점에서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게다가 가톨릭에서는 자살을 금기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씨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배경은 대체 무엇일까. 우선 김씨의 지난 삶에서 그 단초를 한번 찾아보자.
알려졌다시피 김씨는 30여년 동안 군 생활을 해온 예비역 장성이다. 육사(18기)를 졸업한 뒤 수경사 33단장, 22사단장, 7군단장 등 요직을 거쳤고 지난 93년 10월 모교인 육사 교장을 끝으로 군문을 떠났다.
군 안팎에서 ‘장군 김정헌’에 대한 평판은 ‘천생 군인’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지난 19일 빈소인 분당 차병원 영안실에서 만난 그의 군 선후배·동료들은 “청렴하고 강직했다”, “조용하고 합리적이었다”, “군인정신이 투철했다”는 말로 생전의 그를 떠올렸다.
김씨가 전방 모 부대 사단장으로 근무할 당시 부하장교였던 한 현역대령은 “김 장군은 철책 근무에 들어가는 장병들을 불러 꼭 회식자리를 가졌다. 어린 병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기 위해 회식자리에서 노래도 곧잘 부르던 지휘관이었다”고 술회했다.
김씨는 지난 67년 맹호부대 대위로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월남전 당시 그와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한 예비역 장군은 “(김 장군은) 과묵한 성격에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도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잘 반영해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고인의 형제가 추억하는 ‘인간 김정헌’은 군문에서 보는 그의 이미지와 사뭇 차이가 있다. 김씨의 동생은 “형님은 어려서부터 교육에 관심이 많아 사범학교에 가서 교사가 되려고 했다. 형님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군에서도 이어져서 육군3사관학교장, 육사 교장 등을 지내며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씨에게 군 시절이 좋은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군을 떠난 시기는 지난 93년 10월. 당시 김영삼 정부가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과거 멤버였던 김씨도 군복을 벗게 됐다. 육사18기 선두주자로서 동기에 비해 늘 진급이 빨랐던 그는 원치 않는 전역을 하면서 YS정부에 대해서 무척 서운해 했다고 한다.
▲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기각된 지난 14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사람들이 탄핵 지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음. 임준선 기자 | ||
김씨는 전역 후 1년간 기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가나안농군학교를 다녔다. 평소 농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곳에서 자연농법을 배우고 실제로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후 김씨가 몰입한 것은 신앙이었다. 지난 98년부터 2000년까지 혜화동에 위치한 가톨릭교리신학원에 다니며 교리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김씨는 전역 후 종교활동에 전념해 온 것으로 보인다. 김씨의 아들은 “아버지는 다른 바깥 활동은 거의 하지 않으셨다. 교리공부를 틈틈이 하면서 선교사 자격증을 따고 싶어 하셨다. 남은 인생을 봉사하면서 사는 게 꿈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김씨는 지난 2002년 월남전 참전으로 인한 고엽제 후유증으로 다발성 골수종(백혈병의 일종)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경험했다. 당시 위험한 고비를 넘긴 그는 더욱 종교에 매달렸고 최근에는 건강도 거의 회복된 상태였다. 그는 병마를 이기기 위해 작전일지를 쓰듯 병상일지까지 기록하며 철저히 몸관리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평생 군인’이길 원했던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자살을 엄격히 금하는 가톨릭 신자이고 각고의 노력으로 병마에서 상당 부분 벗어나게 된 김씨가 끝내 죽음을 선택한 사실에 대해 과연 그의 지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육사 출신의 예비역 장성 박아무개씨(60)는 “삼성(三星) 장군까지 지낸 사람이면 국가관이 투철하고 늘 나라 걱정을 하는 사람이다. 지금 상황을 보라. 대통령이 헌법을 유린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탄핵했다. 그런데 법관들이 이를 뒤집었다”면서 “김 장군은 이런 사태에 통탄해 자살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박씨는 “김 장군은 YS가 군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DJ가 북한과 손잡는 데다가 노무현 대통령마저 반미 분위기를 형성해 놓은 현실에 분개해 왔다”고 전했다.
또 다른 예비역 장성 서아무개씨(65)는 “김 장군은 YS정부 때 군에서 쫓겨나다시피 전역했다. 관례에 따라 정부산하기관에 자리도 만들어 주지 않았고 연금만으로 생활해 왔다. 또 정부의 예비역 장성에 대한 예우도 형편없었다. 게다가 고엽제 후유증까지 앓았으니 여러 가지로 괴로웠을 것이다”며 “김 장군의 성격상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나으리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했다.
과연 몇몇 지인들의 생각처럼 김씨는 국가의 ‘암울한 현실’과 ‘초라한 장군의 자화상’ 때문에 막다른 선택을 했던 걸까. 누구도 그의 속내를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그가 남긴 유서의 한 구절(“나의 목숨을 국가에 바친다”)을 보면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죽음을 선택한 그 순간 그는 이미 오래전 그 시절의 군인으로 돌아가 있었다’는.
김씨의 유서 내용
이 나라가 어떻게 해서 이룩해 놓은 나라인데
최근 대통령 3명이 나라를 희망이 없는 나라로 망쳐 놓았고
헌법을 유린해도 헌법을 지켜내지못하는 얼빠진 법관들을 보고는
항의의 표시로 얼마 남지 않았을 나의 목숨을 국가에 바친다.
2004. 5. 17
김 정 헌
목맨 시간 : 자정 무렵
집전화 ×××-××××
핸드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