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금실 법무장관. | ||
이 모임의 창립 멤버들은 대부분 “당시 법학도로서 법서적을 읽고 서로 토론하는 독서스터디 형태였는데, 이 모임이 오늘날 이렇게 뜨거운 쟁점이 될 줄은 몰랐다”며 못내 부담스러워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법조계의 새로운 이너서클’이라고 보는 일각의 시각도 이들에겐 무거운 짐이다. 과연 우리법연구회는 어떤 모임인가. 그 출발의 뒤안길을 따라가봤다.
우리법연구회의 모태는 서울대 법학과 75학번이 주도한 독서 스터디 그룹이다. 유신이라는 암울한 시대적 배경 아래 당시 서울대 법학과 대학생들도 일찌감치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그룹과 사회 관련 서적 등을 탐독하는 그룹 등으로 양분돼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강금실 강신섭 오진환 박종술 이태화 등이 주로 후자에 속하는 소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유신이 막바지로 치닫던 79년에 대학을 졸업한 이들은 10·26사태, 12·12쿠데타, 5·18광주항쟁 등 소용돌이 치는 정국에서 시국에 대한 고민과 사법시험 준비라는 현실적 문제에 부닥쳤다. 결론은 법으로 정의를 실천하자는 것.
오진환 판사가 79년에 사법시험에 먼저 합격했고, 이어 2년 뒤인 81년에 강 장관과 강신섭 변호사가 합격했다. 사시 23회였다. 당시 사시 23회에는 서울대 법학과 후배들도 상당수 합류했다. 76학번인 김종훈 변호사, 유남석 판사, 77학번인 이광범 한기택 판사 등이었다.
강 장관과 함께 우리법연구회 창립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김종훈 변호사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1백여 명 남짓하던 사시 합격자 수를 3백 명으로 대폭 늘렸다. 합격자가 많아질수록 밥그릇 싸움이 더욱 치열해져서 소위 말하는 ‘딴 생각’을 못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시 23회 출신들은 좀 남달랐다. 유난히 스펙트럼이 다양해서 강한 개성이 표출된 적도 많았지만, 이전 기수와는 다른 독특한 동질감이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사법연수원 13기를 수료하고 83년에 정식으로 법복을 입은 강 장관과 강신섭 변호사는 법조계 2년 선배가 되어버린 동기생 오진환 변호사와 대학 3년 선배이면서도 연수원 동기생인 박윤창 판사와 다시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5공 시절 초보 판사의 어려움을 가끔씩 갖는 만남과 토론을 통해 해소했고, 필요성에 의해 다시 독서 스터디 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물론 대상 도서는 사회 관련 서적에서 주로 법학 관련 서적으로 바뀌었다.
87년 6월 항쟁 등 민주화 열기가 다시 불어닥치고, 대통령직선제로 88년 6공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법부에도 소장 판사들을 중심으로 권위주의에 도전하는 기운이 꿈틀댔다. 그것이 외부로 표출된 것이 이른바 2차 사법파동. 당시 노태우 정권이 김용철 대법원장을 유임시키려 하자 젊은 판사들이 중심이 돼 “민주화 시대에도 여전히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에 불과한가”라며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전국의 소장판사 4백30여 명이 서명에 돌입한 이 파동의 진원지는 김 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유남석 이광범 한기택 판사, 심규철 전 의원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서울대 법학과 76~77학번 선후배들로 대학시절부터 학회지와 이념서클 등의 활동으로 동지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대학 후배들의 ‘거사’를 지켜본 강 장관 등 선배들은 이들에게 독서 스터디 모임에서 함께 공부할 것을 제의했다. 특히 오 변호사를 제외하고는 이들 모두가 연수원 동기생이어서 자연스러운 유대감이 형성됐다. 그렇게해서 88년 10월 첫 모임을 가졌다. 사실상 우리법연구회의 첫 출발이었던 셈이다.
이 모임의 창립멤버였던 한 관계자는 “처음부터 이름을 걸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냥 함께 법 공부를 같이하는 대학 동문의 스터디 그룹과 같은 형식에 가까웠다. 당시 10여 명의 구성원 또한 판사와 변호사가 혼재해 있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 모임이 마치 법원 내의 특정 사조직과 같은 시각으로 비쳐지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일정한 규칙이나 리더가 없이 동호회 형식으로 모임이 유지되던 가운데 89년 심규철 전 의원과 박시환 변호사가 합류하는 등 부피가 서서히 커지면서 모임의 정례화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다. 우리법연구회의 한 창립 멤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보다 더 체계화된 모임의 필요성에 공감했고, 그 역할을 담당한 강 장관과 김종훈 변호사가 특히 많이 애썼던 것으로 기억난다”고 밝혔다.
실제 89년 11월 이 모임이 ‘우리법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정식 발족하면서 김 변호사가 초대 총무를 맡았고, 강 장관은 회칙을 직접 작성하는 등 사실상 모임의 근간을 만드는 역할을 담당했다. 회칙은 전체 회원의 뜻을 수렴하는 형식이었으나, 대체적으로 모임의 취지에 공감하고 있었기에 산파역이었던 강 장관이 사실상 전권을 가지고 작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당시 우리법연구회의 최초 회칙은 ‘모임 이름’부터 ‘징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9개 조로 구성돼 있는데 작성자인 강 장관의 성격을 드러내듯이 간결하면서도 엄격한 내용이 특징이다.
강 장관은 이 모임의 목적을 ‘법률전문인의 비판적 시각으로 법이론, 법제도와 운영실태 등 법률문화현상을 법이념과 사회현실의 유기적 관련 아래 조사, 연구해 궁극적으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고 실질적 정의가 실현되는 민주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함’이라고 명시했다.
초기의 회원 자격은 변호사 자격을 가진 법률전문직업인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95년부터는 판사들만으로 그 자격을 제한했다. 일각에서 ‘재조 법조계의 새 이너서클’ 운운하는 것도 이 대목 때문. 이에 대해 모임의 한 관계자는 “판사와 변호사가 함께 모여있는 모습이 자칫 외부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고, 또한 당시 변협이나 민변과 같은 변호사 단체가 많이 있었다는 점이 고려된 것일 뿐, 판사들만의 이너서클을 위한 개념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회칙에 따르면 창립 당시 임원은 별도로 구성하지 않고 총무 1인과 약간명의 운영위원을 둔다고 되어 있다. 모임의 한 관계자는 “처음에는 회장이 없이 총무가 연락책을 담당하는 것으로 했으나, 이후 규모가 커지면서 창립회원 중 제일 연장자인 박윤창 판사가 초대 회장이 됐다”고 전했다.
강 장관은 당시 회원의 자격을 상당히 엄격한 잣대로 규정함으로써 모임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드러냈다. 회칙에 따르면 ‘회원 가입에 관한 동의는 기존 회원의 만장일치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한 명이라도 반대한다면 입회 자체가 안되는 것. 또한 징계 절차에 있어서도 ‘회원이 이 모임의 목적에 어긋나는 활동을 해 이 모임에 손상을 입혔다고 인정될 때에는 총회의 의결에 의하여 제명할 수 있다’고 못박고 있다.
주요 회원들의 면면이나 그간 행적으로 보아 우리법연구회를 법조계의 새 이너서클로 보는 일각의 시각은 ‘난센스’인 듯하다. 하지만 이들의 ‘비판적 공부’가 긴 세월이 흐른 지금 빛을 발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