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영씨 | ||
기자가 임 목사의 증언과 임 목사 가족들의 호적 관계를 직접 확인해본 결과, 이씨의 결혼 사실은 명백하게 드러났다. 임 목사는 자신의 환갑잔치에 아들 딸 며느리 손자 등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도 공개했다. 여기에는 10여 년 전의 모습이지만 또렷하게 이씨의 모습이 있었다. 그녀 앞에는 어린 소년이 앉아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씨의 아들이다. 이 사진에는 죽기 전 이씨의 남편도 함께 있었다.
기자가 최초 이수영씨의 과거에 대해 석연찮은 점을 포착한 것은 지난 5월 초였다. KBS 위성방송인 KBS코리아의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이란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시청자 게시판에 짤막한 글이 하나 올라온 것.
‘벤처 신데렐라 이수영씨가 말하는 가족의 의미는?’이란 글이었다. 이 글을 작성한 장아무개씨는 “3월22일 방송된 ‘정범진, 이수영’ 편을 보고 생각나는 바가 있어 몇 자 적는다”고 운을 뗀 뒤, “방송에서 이씨는 ‘능력이 안돼서 가족을 못 가졌다’, ‘좋은 가족이 있으면 좋겠다’, ‘(정 검사가) 가족에 대해 얘기하니 너무 마음에 와 닿았다’는 등 유난히 가족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정 검사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이씨에게 본인이 말하는 가족의 범주를 묻고 싶다”고 밝혔다.
특히 주목되는 내용은 “십 수년 전 귀하와 지금은 고인이 된 임××과의 사이에 태어났지만, 귀하의 친권으로부터 방치되어 현재 연로한 친조부모 손으로 양육되고 있는 임○○은 소위 귀하가 말하는 가족이 아닌 모양”이라는 부분이었다.
‘고인 임××의 형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한 장씨를 기자는 수소문 끝에 접촉할 수 있었다. 장씨는 “지금은 저 세상 사람이 됐지만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임××과 그의 유일한 혈육인 임○○군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이씨의 비도덕적인 행태에 경종을 울려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장씨는 그 자신이 가족 당사자가 아니라며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은 피했다.
▲ 이수영씨 | ||
임 목사는 지난 5월27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최근 언론에서 주목받고 있는 ‘미혼의 벤처 여왕’ 이씨가 자신의 며느리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그리고 그녀의 17세 된 아들을 자신이 직접 키우고 있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는 “언론 보도를 통해 보면 며늘아기가 수백억원대의 재력가라고 하는데, 막상 자신의 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큰일”이라며 “듣기로는 곧 결혼을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우리 두 늙은이가 죽고 나면 손자 ○○이는 사생아가 되는 것 아닌가. 애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한숨을 쉬었다.
지난달 31일 임 목사는 보다 구체적인 그간의 숨겨진 얘기들을 하나 하나 공개했다.
사망한 임 목사의 차남 임××씨가 이씨를 만난 것은 80년대 중반 무렵. 당시 임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에 실패한 채 군대를 다녀와서 재수를 하던 때였고, 이씨는 세종대 무용학과에 재학중이었다. 나이는 임씨가 이씨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두 사람은 뜨겁게 연애를 했고 87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됐다.
재수생의 신분으로 졸지에 가장이 된 임씨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겠다며 유학을 결심했다. 90년에 미국으로 먼저 건너간 임씨는 한인사회의 한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기반을 잡은 뒤 아내 이씨를 불러들였다. 이씨 역시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 했던 까닭이다. 이씨는 92년 미국의 뉴욕대학원에 입학했고, 아들 ○○군은 시댁에 맡겨두었다.
임 목사 가족측에 따르면 임씨는 아내 이씨의 대학원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낮에는 신문사에서, 밤에는 택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무리하다가 현지에서 덜컥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놀란 임 목사측은 속히 아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임씨는 92년 말 귀국해서 6개월여 동안 투병하다가 93년 결국 사망했다. 당시 아내 이씨의 나이 28세, 아들 ○○군의 나이는 불과 6세 무렵이었다.
임 목사는 혼자가 된 이씨가 안쓰러운 마음에 “하던 공부 마저 다 하고 자리를 잡기 전까지 ○○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맡아주겠다”고 했고, 이씨도 여기에 동의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사실상 ○○군의 엄마 노릇은 당시 미혼이었던 임씨의 누나가 대신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학부모 노릇도 고모의 몫이었다.
그 동안에 이씨는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한성대 강사와 MBC 리포터 등을 거쳐 외국인회사에서 근무하며 기반을 잡고 있었다. ○○군이 초등학교 6학년에 진학하던 99년, 시댁측은 이씨에게 “이제 너도 기반을 잡고 했으니 애를 위해서도 엄마 곁에 두는 게 좋겠다”며 ○○군을 보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임 목사는 “우리는 당시 서울 구로동에 살고 있었고, 며늘아기는 강남에 살고 있었기에 중학교 배정을 위해서라도 그 전에 보내는 게 아이 장래를 위해서나 여러모로 더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임 목사에 따르면 그러나 1년여 후인 2000년 겨울 무렵, 밤늦게 ○○군이 혼자 가방을 짊어진 채 다시 구로동의 할아버지 집을 찾았다고 한다. 임 목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애가 지 에미 기대만큼 공부도 못 따라간 데다가 말을 안 듣는다고 무척 엄격하게 야단치고 한 모양이다. 애는 애대로 주눅이 들고 겁을 먹어 할머니와 고모를 찾으니까 며늘아기가 화가 나서 ‘여기서 살 건지, 할아버지 집에서 살 건지 택하라’고 다그치자, 결국 아이가 집을 나온 모양”이라며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제 자식을 한밤중에 가방 하나만 들려서 내보낼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 이수영씨가 최근 낸 자서전 <나는 이기는 게임만 한다> | ||
그후 시댁측은 ○○군이 한창 사춘기의 예민한 시기임을 감안해 고등학교 때까지만 맡아주고 대학에 진학하면 그 스스로의 선택에 맡기도록 해야겠다는 뜻을 정했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해 이씨가 ‘벤처업계의 신데렐라’로 부쩍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웹젠의 대주주로 알려지면서 5백억원대의 재력가로 소개되기도 했다. 실제 그녀는 당시 언론사와의 한 인터뷰에서 “잠원동 34평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한달 생활비는 5백만~6백만원 정도 쓴다. 돈 없으면서 있는 척하려고 펑펑 쓰는 것도 싫지만, 돈 있는 사람이 맹꽁이 짓 하면서 돈 안 내고 벌벌 떠는 것도 싫다”고 밝히기도 했다.
임 목사는 이씨에게 지난해 9월께 등기편지를 발송했다. “유일한 혈육인 자식을 그렇게 방치해선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양육비 문제를 꺼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어머니라면 당연히 자식의 장래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언론에는 ‘미혼의 벤처 여왕과 재미동포 검사와의 결혼 예정’ 로맨스 기사가 도배되고 있었다. 지난 3월에 다시 임 목사측은 “자식이 있는 기혼 여성으로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내용증명을 보냈으나, 이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새롭게 결혼할 사람과 TV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행복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임 목사는 기자에게 자료를 공개하면서 “이제 우리 노인들이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우리가 죽고나면 손자는 완전히 혼자 외톨이로 내던져진다. 유일한 혈육인 엄마라는 사람은 밖에서 그렇게 갑부 소리를 듣고 유명세를 타도 지금껏 10원 한푼 애를 위해 준 적이 없다. 또한 버젓이 처녀 행세를 하며 새롭게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분노했다.
임 목사가 더욱 씁쓸해 하는 것은 사전에 아무런 얘기도 없이 이씨가 자신의 호적을 옮긴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기 때문이다. 애초 호적등본에는 아들 임씨가 사망하면서 자연스럽게 손자인 ○○군이 세대주가 되고 그 아래에 엄마인 이씨의 이름이 기재돼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호적을 확인한 결과 이씨가 지난 2002년 7월자로 이미 자신의 이름을 파 간 것으로 나와 있었다는 것. 임 목사는 이씨가 법적으로도 완전히 임씨 가족과 ○○군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임 목사는 “그래도 지금까지는 어떻든 내 며느리라고 생각해서 애써 참아 왔는데, 이렇게 남몰래 호적을 파가면 완전히 남남이 되는 것 아니냐”고 허탈해 했다.
한편 이씨는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대해 처음에는 황당하다는 듯 “그런 사기꾼 같은 사람의 말을 믿고 내게 그러느냐”고 항의했다. 그러나 장씨와 임 목사측의 주장 등 구체적인 내용을 이야기하며 “결혼한 사실이 있는지, 아들이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거듭 요청하자 “설사 그렇다고 한들, 그것이 왜 여기서 거론되는가”라고 한발 물러서는 입장을 보였다.
이씨는 “사안을 좀 알아보고 곧 연락하겠다”며 기자의 연락처를 확인한뒤 전화를 끊었으나, 이후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취재진은 지난 5월28일 이씨와의 첫 통화 후 31일까지 나흘간에 걸쳐 계속해서 연락을 시도했고 메시지를 남겼으나, 이씨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특히 이씨의 자전 에세이 <나는 이기는 게임만 한다>가 본격적으로 시판되기 시작한 지난달 31일 기자는 직접 이씨의 강남구 역삼동 사무실을 찾았으나 자리에 없었다. ‘이씨와 직접 통화를 하고 싶다’는 기자의 요청에 회사의 한 관계자가 직접 이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씨는 회사 관계자를 통해 “몸이 많이 불편해서 지금 통화를 못하겠다”는 말만 남겼을 뿐이다.
이씨의 저서 <나는…>에는 발레리나를 꿈꾸던 어린 시절부터 최근 정 검사를 만나기까지의 과정들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책 내용 어디에도 죽은 임××씨나 아들 ○○군에 대한 구체적인 사연은 없었다. 다만 이씨는 책 속에서 아들임을 밝히지 않은 채 한 차례 ‘중요한 사람’이란 상징적 표현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