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7년 당시 이한영씨 피살 현장에 출동한 경찰. | ||
이씨의 부인 김종은씨(35)가 국가(법무부)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가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은 지난해 2월. 이후 “남편은 정부의 보호관리 소홀로 살해된 것”이라는 김씨측과 “이씨가 스스로 언론에 나서 화를 자초했다”는 정부측이 1년여 넘게 팽팽한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담당 재판부(민사합의 12부 조관행 부장판사)가 지난 6월15일 피고인 정부측 변호인에게 이씨 피살 당시 수사 기록 및 보호관찰 일지 등 방대한 관련 자료의 목록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 지난 7년간 수사 자료 공개를 꺼려온 정부가 과연 재판부의 명령에 어떤 입장을 보일지도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또한 향후 구체적인 자료와 기록이 재판부에 제출될 경우, 사건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벌써부터 법정 주변이 술렁이고 있다.
김종은씨는 당시 소장에서 “(남편 이씨가) 북한 최고위층 친인척 탈북자 신분으로 정부 당국의 철저한 보호가 요망되는 ‘요시찰 보호대상’임에도 괴한에게 공공장소인 아파트에서 피살됐다는 것은 국가의 직무유기 사항”이라며 “특히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철저히 관리돼야 할 개인의 신상기록이 쉽게 외부로 유출될 만큼 경찰청 전산망이 허술하게 관리됐다는 점에서 국가는 그 책임을 면하기 힘들다”고 강조했다(사건 당시 이씨의 거주지 기록이 경찰에서 심부름센터로 유출되었으며, 이 자료가 이씨를 살해한 괴한에게 전달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김씨는 “국가정보원 및 정부기관들이 수사 과정에서 기본적 인권을 무시하면서 어떠한 피해보상도 제공한 바 없다”고 덧붙이면서 가족들이 입은 물질적·정신적 피해보상으로 5억원을 지급하라고 청구했다.
재판부는 소장을 접수한 이후 약 1년 2개월간 김씨 및 법무부, 서울지방경찰청, 분당경찰서 등 사건 관련 당사자들의 답변서를 제출받았으며, 올해 4월 들어서야 두 차례 공판을 속행했다.
지난 4월6일과 27일 열린 두 차례 공판에서 대두된 쟁점 사항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되고 있다. 첫째는 이번 손해배상 청구가 법으로 규정된 손해배상 청구 소멸 시한 내에 제기됐느냐의 여부다.
정부측은 김씨의 청구는 소멸 시효 기간 3년을 넘긴 상황에서 제기된 것이기 때문에 청구 자체가 무효라는 주장이다. 국가의 중대과실로 피해를 입을 경우 적용되는 국가배상법에는 손해배상 청구 시효를 ‘피해자가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정부는 이씨가 피살당한 시점이 97년 2월15일이었고, 이씨가 피살당한 이후 이씨의 개인 정보를 유출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조아무개 전 서울지방경찰청 정보과 경사가 유죄(벌금 2백만원)를 선고 받은 시점도 지난 97년 5월15일이므로 이미 배상 청구 가능 ‘조건’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김씨는 남편을 살해한 범인이 아직 검거되지 못한 상황에서 손해배상 청구 소멸 시효를 적용하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 특히 김씨는 사건 이후 국가의 지나친 ‘간섭’ 때문에 소송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하고 있다.
김씨는 소장에서도 “남편이 피살당한 이후 국가정보원과 관할 경찰서(분당경찰서) 등으로부터 협박과 압력을 받아왔었고, 그로 인해 지금에 와서야 소송을 진행하게 됐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현행법에서는 ‘불가항력’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는 경우, 손해배상의 소멸 시효를 10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씨의 피살을 국가의 보호관리 책임 탓으로 직접 연결지을 수 있느냐에 대한 부분 역시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쟁점 중 하나다. 즉 경찰관이 개인 신상을 외부인에게 알려준 행위가 괴한들이 이씨를 피살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느냐의 여부가 논란의 핵심인 것.
정부측은 비록 국가 공무원이 이씨의 신원을 무단 유출한 잘못은 있지만 이씨가 지난 96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처인 이모 성혜림씨의 탈북설과 관련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얼굴을 공개했고, 그 해 여름 북한 핵심 권력층의 사생활을 공개한 수기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까지 내고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자연스럽게 모든 개인 정보가 외부로 알려졌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특히 정부측은 당시 한국에 귀순한 지 14년이 지난 이씨의 근접 보호 및 경호 의무가 사실상 종결됐었다는 주장도 덧붙이고 있다. 정부측 변호인 최종우 변호사(법무법인 하나)는 “특히 이씨는 결혼한 이후부터 사생활 침해라는 이유를 들어 정부의 통제 및 보호 감시를 거부한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씨측은 이러한 사안을 쟁점화시키는 정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김씨의 대리인 격인 피랍·탈북인권협회 도희윤 사무총장은 “언론 보도 문제는 국민의 알 권리와 관련한 사항이고, 더욱이 이씨가 언론에 나와 실제 자신의 소재지나 사생활을 공개한 적은 전혀 없다”면서 “경호 문제를 떠나 이씨가 피살당하기 직전 선배 집으로 주소지를 옮겨 놓자마자 곧바로 그 주소지가 외부로 공개됐다는 점은 국가의 ‘요시찰 보호 대상’ 신상관리 시스템에 큰 하자가 있었던 걸 보여주는 반증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특히 사건 발생 당시 김충남 분당경찰서장이 “경찰은 사건이 난 후에야 이씨가 아파트에 임시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변보호는 경찰만 하는 것이 아니다”고 언론에 밝힌 점으로 보아 정부가 이씨에 대한 신변보호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가운데 최근 정부측은 또 하나의 새 쟁점을 법정에 올렸다. 손해배상청구권 소멸 시효가 만료됐다는 기존 주장에서 더 나아가 ‘김씨가 배상청구 당사자가 아니다’는 점을 새롭게 강조하고 나선 것. 김씨를 이씨의 유족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인 셈이다.
정부측은 이씨가 피살 직전까지 부인과 협의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정부측 최 변호사는 “이씨는 사고가 있기 두 달 전부터 김씨와 협의이혼 절차를 밟고 별거중인 상황이었다”며 “비록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이나 정식적으로 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김씨는 손해배상 청구권이 없는 게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한 상태다.
이에 김씨측은 “이혼을 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이씨는 부인에게까지 사업 실패로 인해 생긴 채무의 ‘짐’을 지워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혼하려 했던 것일 뿐”이라며 “법적으로 이씨의 아내인 김씨가 배상 청구 및 수혜 대상자가 아니라는 것은 억측에 불과하다”고 정부측 주장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처럼 양측의 입장차가 확연하게 대립되는 가운데 지난 4월27일 이후 공판이 아직 속개되지 않고 있는 상황. 재판부가 지난 6월15일 피고인 정부측에 명령한 이씨 피살 관련 수사 자료 목록의 제출이 미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측 변호인 전승만 변호사는 “정부측에서 재판부가 요구한 자료 제출을 늦추고 있어 재판 속개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피랍·탈북인권협회 도 사무총장도 “정부측이 이미 몇 차례 재판부에 제출한 자료는 이씨가 출입한 유흥업소의 접대부 이름 등 사생활을 추적하거나 보호관찰과 관련, 경찰과 시비가 붙었던 부분만 추려진 내용”이라며 “재판부도 정부측의 자료 제출 작업이 성실하게 이뤄지고 있지 않다고 판단, 추가 자료를 요청했으나 정부측에서는 아직 별다른 반응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정부측 최 변호사는 “아직 분당경찰서에서 안기부에서 넘겨받은 사건 관련 기록 및 경찰 수시 일지 등을 넘겨주지 않아 재판부에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분당경찰서는 최 변호사를 통해 재판부의 자료 제출 명령을 통보 받았지만 아직 미해결 사건이라는 이유로 수사 자료 제출 및 공개에 난색을 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가 지난 6월15일 정부측 변호인에게 발송한 ‘문서목록 제출명령서’에는 괴한에게 저격당한 후 이씨가 옮겨졌던 분당 차병원의 10일간의 관련 임상 자료 및 지난 97년 11월 국정원(당시 안기부)이 ‘고영복 교수 간첩 사건’ 수사 과정에서 체포한 간첩 최정남의 진술서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안기부는 최정남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씨는 북한 테러 전문 요원 세 명으로 구성된 특수공작조 ‘순호조’에 의해 살해됐다”고 발표한 바 있다.
과연 이 송사의 ‘승자’는 누가 될까. 이번 재판을 통해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이한영씨 피살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재판부의 관련 자료 제출 명령으로 재판이 새로운 분수령을 맞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