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씨는 숙명여대 재학중인 1966년 당시 22세의 나이에 김아무개씨와 결혼했고, 곧바로 1남1녀를 낳았다. 장녀가 바로 탤런트 김주승의 아내고, 그 동생이 이번에 귀국한 김씨. 장씨는 첫 남편과 원만치 못한 결혼 생활을 이어오다가 결국 77년 이혼했다.
장씨는 곧바로 사업가 홍아무개씨와 재혼했으나 이 역시 1년을 가지 못한 채 다시 결별로 끝이 났다. 지금의 남편인 이철희씨를 만난 것이 바로 이 무렵. 두 사람은 79년 당시 유정회 의원이던 이씨와 해남의 한 사찰에서 조용히 결혼식을 치렀다.
장씨는 자신의 형부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씨의 위세를 등에 업고 거액을 끌어들이다 15년형을 선고받고 부부가 같이 구속되면서 본격적인 수형의 삶을 시작한다. 이때 아들 김씨는 불과 사춘기 중학생이었다.
김씨가 처음으로 법정에 서게 된 것은 뜻밖에도 군복무중 군법정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기도 고양에서 사병으로 군복무중이던 92년 6월께 그는 무단 탈영을 했고, 8개월간의 무단 탈영으로 군사보통법원에서 당시 징역 10월, 집행유예 1년6월을 선고받았다는 것.
그런데 당시 그의 탈영 시기가 어머니 장씨가 10년의 수감 생활 끝에 92년 4월 가석방으로 출소한 지 불과 2개월 후의 일이어서 어머니 장씨와의 연관 관계가 화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또한 대개의 경우 6개월 이상의 장기 탈영자가 보통 1~2년의 실형을 선고받던 것과는 달리 집유라는 가벼운 형벌만을 받은 데 대해 그 배경에 어머니가 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쏠리기도 했다.
그가 제대하자마자 94년 어머니가 다시 어음부도사건으로 재수감됐다. 어머니 장씨가 98년 광복절 특사로 출감한 뒤, 그는 어머니의 사업을 도왔다. 결국 이것이 또 문제가 되어 2000년 5월 그는 ‘구권화폐 사기극’에 연루돼 어머니와 함께 구속 수감되는 비운을 겪었다.
1심 판결은 징역 1년. 이듬해 10월 항소심에서 그는 “어머니 지시에 따라 일을 했을 뿐, 자신이 직접 편취하고자 했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무죄로 풀려나왔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도 옥중에 있던 장씨가 아들을 위해 모든 잘못을 자신이 혼자 뒤집어 쓰려 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그는 무죄를 선고받은 이후 무역업에 손을 대며 재기를 꿈꿨으나 결국 이듬해 2월 만취한 상태에서 뺑소니 사고를 일으키고 해외 도피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소식을 옥중에서 들었을 어머니 장씨의 심정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 부분. 옥중에서 그가 신문사에 직접 편지를 쓰면서까지 아들 김씨의 결백을 주장하려 했던 것도 아들에 대한 자책과 회한의 심정에서 나왔을 것이다.
요즘 장씨에게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