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화성의 SK가문 선산. 아래는 출입구로 한 경비업체의 ‘경고’가 이채롭다. | ||
<일요신문>이 국내를 대표하는 10대 재벌가의 선산을 취재한 결과, 대부분이 서울 인근의 경기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지방은 세 곳 정도에 불과한데, 그 중에서 두 곳이 차례로 화를 당한 셈이다. 그렇다고 수도권 지역이라고 해서 마음을 놓을 형편도 못된다. 인적이 많고 외부에 상당히 노출된 때문이다.
또 다시 각 재벌가는 비상이 걸린 모습이다. 이들 가문의 선산은 원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지만 최근 들어 관리인이 상주하며 경비를 더 강화하고 나섰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조부모 묘소가 있는 곳은 충남 공주시 정안면 보물리. 이곳이 지난 10월20일 밤 도굴꾼에 의해 훼손됐다. 21일 한화측이 직접 확인해본 결과 봉분 뒤편이 파헤쳐진 채 조부의 두개골이 유실됐음을 발견했다.
현지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한화그룹 창업주인 고 김종희 회장의 산소 또한 인근에 함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거기에는 묘지 관리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안면의 한 주민은 “창업주 묘지 말고 조부 묘를 도굴한 것으로 봐서 거기에는 관리인도 없고 경비가 허술할 것으로 여긴 모양”이라고 나름대로 추정했다.
이 사건 이후 각 재벌가에는 한동안 소홀했던 선산에 대한 경비 강화에 또다시 부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혹시라도 선산의 위치나 경비 태세가 외부에 유출될까 보안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가장 예민한 ‘로열패밀리’는 역시 롯데가. 이미 5년 전 한 차례 혹독한 곤욕을 치른 바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5년 만에 다시 찾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의 롯데가 선산 주변은 때마침 터져나온 최근 사건 등으로 인해 낯선 외지인에 대한 인근 주민들의 경계심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선산 인근에 위치한 롯데가의 별장에는 큰 철제문들이 모두 굳게 잠겨 있었고, 개짖는 소리만 요란했다. 철제문에는 ‘개인 소유이니 외부인 출입을 금한다’는 푯말이 굳건하게 붙어 있었다. 어렵사리 현장을 지키는 관리인 부부를 만날 수 있었으나 “5년 전 사건 이후로 묘지는 옮겼다. 우리는 어딘지 모른다. 벌초 등 묘지 관리는 양산의 롯데 회사에서 한번씩 와서 직접 관리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인근 주민들은 선산의 위치는 충골산의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등산을 할 작정이 아니면 함부로 나서지 말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근처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한 주민은 “이웃 주민에 따르면 20층 정도의 높이에서는 묘터의 모습이 얼핏 보인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는 “본사 직원들도 수시로 점검을 나오는 모양이지만, 여기 있는 별장 관리인이 당연히 산소도 관리한다”고 덧붙였다.
롯데그룹의 한 관계자는 “워낙 산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5년 전 사고를 당했다고 해서 별도로 경비원을 두거나 출입문을 만들어서 봉쇄하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국내 재벌을 대표하는 양대 가문인 삼성과 현대는 창업주의 성향에 따라 선산의 비중에 다소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우선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선산의 풍수지리적 요소를 대단히 중요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그 위치적 중요성은 물론 보존을 위한 경비에도 상당한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수원 이목동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 회장의 조부모와 부모 묘소는 원래 증조부 묘소가 있던 고향 경남 의령에 있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거기에는 고 이 회장이 풍수지리를 중요시하는 계기가 된 하나의 비화가 전해진다.
1966년 이른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큰 악재를 만난 이 당시 회장은 당대 이름 높은 한 지관을 통해 조상의 묘를 감정했다. 그 결과, 증조부 묘는 더없는 명당이나, 조부와 부친 묘는 물이 가득차 있는 흉지라는 결론이 나왔다. 주변에서 미신이라고 믿지 않았으나, 실제 살펴본 결과 지관의 말이 맞았다. 이 회장은 지관의 평가에 따라 조부와 부친 묘를 지금의 수원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은 평소 경비원이 상주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용인 에버랜드 내에 있는 고 이 회장의 묘 역시 철저한 통제와 경비로 일반인의 출입을 절대 금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롯데가 도굴사건’ 직후에는 특수부대 출신들로 구성된 경비원들이 대규모 투입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바로 옆에 호암미술관이 있는 데다, 평소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고 이 회장 묘에 대한 세간의 근거없는 부장품 소문 때문이었다.
▲ 울산 울주군의 롯데가 별장. ‘개조심’ 푯말이 눈길을 끈다. | ||
반면 현대가의 가족묘로 알려진 경기 하남시 창우동의 묘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대적으로 경비가 다소 느슨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최근 사건 이후로 부쩍 경비가 강화되었다. 10월30일 기자가 현지를 방문했으나, 회사에서 파견돼 상주하고 있던 한 관리인의 엄격한 출입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관리인은 “최근 한화가 도굴 사건 이후 위에서 더 경비를 철저히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면서 출입문 자체를 열려 하지 않았다. 겨우 출입문을 통해 관리인 숙소까지는 들어갈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의 진입은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인근 주민들은 “전에는 간혹 등산객들이나 주민들에게 참배를 허용하기도 했는데, 아마 이번 사건 때문에 그러는 모양”이라고 전했다.
주변의 설명에 따르면 현대가 선산의 전체 면적은 약 3천 평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야산으로 실제 묘역의 크기는 1백 평 남짓이라고. 거기에는 정 명예회장 부모의 묘가 나란히 있고, 그 바로 밑에 똑같은 크기의 정 명예회장 봉분이 있다고 한다. 동생 신영씨의 묘소와 아들 몽헌씨의 묘소도 함께 있는데, 그다지 화려한 편은 아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보수적인 가풍이 강한 LG가 역시 선산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특히 형제가 많은 창업주 고 구인회 회장 일가는 가족묘로 함께 모여 있지 않고 떨어져 있는데, 지난 90년대 초 국회에서 호화묘소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을 때 구씨 일가 형제들의 일부 선산도 거론됐을 정도로 묘역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로열패밀리의 집안 분위기 탓인지 LG그룹 관계자들 또한 선산에 대해 극히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창업주인 고 구 회장 묘지는 부산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데 이곳 역시 LG화학 부산지사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관계자는 “일반인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도록 경비원이 출입 통제를 하며 관리하고 있다”며 더 이상의 구체적인 답변은 피했다. 고 구 회장 선조 묘지 역시 고향인 경남 함안·진주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는 모습이었다.
LG그룹의 한 관계자는 “원래 창업주 선산에 대한 내용은 내부에서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강한 데다, 특히 이번 사건 이후 더욱 예민해진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지난 98년 폐암으로 별세한 뒤 화장을 유언으로 남겨 화제를 낳았던 SK 고 최종현 회장은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선산에 묻혀 있다. 역시 2년 뒤 사망한 조카 최윤원 SK케미칼 회장도 화장을 하고 이 가족묘에 매장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이곳 가족묘에는 맨 위에 SK 창업주 고 최종건 회장의 부친묘가 있고, 그 아래에 층층별로 창업주 최 회장, 최종현 회장, 조카 최윤원 회장 등이 나란히 내려 서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는 점.
SK 그룹 역시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경계경비를 한층 더 강화하는 모습이다. 주변은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고, 철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한 경비보안업체의 경비 시스템도 눈에 띄었고, CCTV도 보였다. 현지에서 근무하는 SK의 이아무개 대리는 “보다시피 도로변과 상당히 가까이 있어 아무래도 그냥 놔두면 일반인들의 왕래가 잦을 수 밖에 없어 이런 설비를 갖추게 됐다”고 전했다.
금호그룹의 고 박정구 회장 산소는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역시 민가와 비교적 가까이 있어 입구는 철책문으로 잠궈놓고 있다. 하지만 다른 재벌가 산소들이 주변 담을 철책으로 둘러싼 것과는 달리 그곳은 나무 울타리를 하고 있어 경비는 다소 허술한 편이었다. 별도의 상주 관리인은 없고 본사에서 수시로 왕래한다고 한다.
관계자에 따르면 “고 박 회장을 비롯한 창업 2세대 일가들이 앞으로 모두 이곳에 안장될 예정”고 한다. 창업주인 고 박인천 회장의 유택은 광주광역시 죽호학원 내에 모셔져 있어 별도의 경비가 필요없다는 것이 그룹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밖에도 한진그룹 창업주 고 조중훈 회장의 묘소와 두산그룹 창업주 고 박두병 회장의 묘소 또한 경기도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한진가는 용인시 기흥읍에, 두산가는 광주시에 각각 선영이 마련돼 있는데 이곳 역시 그룹 차원에서 수시로 관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