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시민 의원 | ||
표절 시비가 불거진 것은 한 네티즌이 미국 경제학자인 토드 부크홀츠가 지난 89년 펴낸
이 네티즌은 “두 책을 비교하니 문장까지도 너무나 흡사하고 인용 문구도 비슷해 전율을 느낄 정도”라며 표절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반면 이를 접한 일부 네티즌들은 “내용이 비슷하고, 여느 전기문을 보더라도 나올 만한 중요한 일화가 몇 개 일치한다고 해서 표절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다”라며 맞서고 있다. 이후 찬반으로 나뉜 네티즌들은 유 의원 홈페이지 등 온라인상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고, 몇몇 인터넷 언론도 이를 기사화하면서 파문은 확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두 책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유사점을 보일까. 일단 두 책에서 똑같은 문구나 표현 등이 쓰인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일부 내용이나 문단 전개 방식 등에서 상당한 유사점을 찾을 수가 있다는 게 표절 의혹을 제기한 네티즌의 입장.
먼저 네티즌이 표절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18C(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부분을 살펴보자. 두 책은 공통적으로 머리말에 이어 18C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스미스의 성장과 그의 유명한 저서인 <국부론>의 탄생 과정, 그리고 그가 남긴 사상 등을 정리하고 있다.
두 책 모두 아담 스미스의 출생부터 14세 때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하는 과정, 그리고 입학 3년 후 옥스퍼드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선발되고 1748년 글래스고 대학에서 강좌를 시작해 도덕 철학과 교수를 맡게 되기까지의 과정 등을 공통적으로 상술했다.
또 아담 스미스가 1764년 프랑스 여행 도중 스위스 제네바로 가 볼테르를 만났으며, 1766년 자신의 여행에 합류했던 버크럭 공작의 아우가 급사(유 의원의 책에선 아우가 노상에서 살해당했다고 표현)해 곧바로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10년 후 <국부론>을 출판하는 과정 등도 비슷한 전개방식을 통해 설명했다.
그 중 아담 스미스가 ▲1764년 버크럭 공작의 장남(유 의원은 귀공자라 표현)의 개인 교수를 맡으면서 글래스고 대학 교수 연봉의 세 배인 3백만파운드 연봉을 받고 추가로 매년 3백만파운드의 연금을 지급 받은 부분과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그곳 교수들을 향해 “대부분의 옥스퍼드 교수들은 가르치는 척하는 것조차도 포기한 작자들이야”라고 혹평한 대목(유 의원은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옥스퍼드 대학 교수들은 몇 해째 가르치는 시늉조차 아예 그만두었다라고 표현) ▲옥스퍼드 기숙사에서 근대 합리주의 철학의 거두인 데이비드 흄의 <인성론> 책을 압수당하는 내용 ▲국부론이 출간되면서 6개월 만에 매진됐다는 내용 등은 꽤 흡사한 구성 방식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죽은 경제학자…>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제시한 아담 스미스의 인용문 역시 <부자의 경제학…>에서도 비슷한 단계에서 인용됐다.
“백정이나 양조업자, 제빵업자들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기에 이익에 대한 그들의 자애심 덕택에 우리가 식사를 기대할 수 있다”는 아담 스미스의 말이 동시에 인용된 것.
▲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왼쪽)과 토드 부크홀츠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 ||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 그 중 ▲밀이 열두 살 때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리스토파네스 등의 책을 읽고, 미적분과 기하학을 마스터했으며, 그 때문에 친구도 없었다는 부분(유 의원은, 열두 살이 되었을 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등 그리스 로마 시대의 철학·역사 문학 서적을 모조리 읽었으며, 기하 대수에도 능통했으나 그 때문에 휴일이나 친구가 없었다고 표현) ▲밀이 엄격한 교육을 받은 결과, 감성적인 면에서는 장난감 목마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내용(유 의원은 다른 젊은이들이 자기와는 전혀 다른 인생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밀이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고 표현)도 비슷한 해석으로 언급됐다.
칼 마르크스를 소개한 단락에서도 ▲철학을 독학하고 종교에 대한 과격 비판자들과 헤겔의 절충 지지파로 구성된 서클에 가입한 뒤(유 의원은 마르크스가 변화에 대한 헤겔의 사상 위에서 무신론과 공산주의 등 현실의 문제를 연구한 한 무리의 청년 지식인 그룹에 참여했다고 표현) ▲박사학위를 취득한 마르크스가 라인신문에 입사해 편집인으로 일하다 파리로 망명, <철학의 빈곤>이라는 저서를 서술하기까지의 과정 ▲‘잉여노동’과 ‘잉여가치’를 설명하는 과정 등이 두 책에서 비슷한 형식으로 소개돼 있다.
<죽은 경제학자…>에서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자녀 셋을 잃는 일화와 마르크스의 가정생활을 염탐한 당시 경찰의 보고서를 소개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 의원 역시 그 보고서를 책에 인용하며 마르크스의 런던 생활을 소개했다.
또한 아버지가 케임브리지 대학 행정책임자를 지냈으며, 어머니 또한 케임브리지 시장을 지내기까지 했다는 자유방임주의 학자 케인즈 성장 과정 역시 유 의원의 책에서도 빠지지 않고 언급돼 있다.
일단 이번 표절 시비를 지켜보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두 책이 영·미 경제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분석을 통해 현대 경제사를 짚어보는 책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즉 두 책의 출판 목적 등을 감안한다면, 집필 과정에서 내용은 물론,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학설 등의 인용이 유사한 흐름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실제 두 저자는 공통적으로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의 목표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장황하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경제에 대한 균형 감각을 높이고 효과적으로 경제학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촉진시키는 데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상당수 경제학자들은 더군다나 두 서적이 학위 논문이나 전문서가 아닌 현대 경제학의 역사를 소개하는 일종의 개론서이기 때문에 일부 서술이나 인용이 중복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의 구성도 비슷할 수 있다며, 이 점 역시 표절 시비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유 의원이 책에서 언급한 내용이나 인용은 관련 학자들이 자유롭게 공유하는 ‘영역’이고 상식에 속하는 대목이기 때문에 표절을 제기하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대다수 학자들은 유 의원이 <부자의 경제학…>을 집필하기 전에 <죽은 경제학자…>를 사전에 접한 사실이 있느냐 여부를 이번 표절 시비를 가리는 중요한 변수로 꼽았다. 실제 <죽은 경제학자…>의 내용과 완벽하게 문구까지 같은 부분은 없다고 할지라도 만약 책을 집필하기 전에 <죽은 경제학자…>의 영문원서를 접한 적이 있다면 ‘문제’는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 의원이 자신의 책에서 참고문헌이나 각주 등을 통해 <죽은 경제학자…>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관련 분야에서 자주 언급되고 논의되는 부분이라면 표절이라 할 수 없지만 사전에 표절 대상 책을 접한 사실이 있고, 실제 그 책과 표현 방식 등이 비슷함에도 인용 출처나 근거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표절 범위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유 의원은 사전에 <죽은 경제학자…>를 읽었을까. 이에 유 의원은 보좌관을 통해 “책을 출판하고 2년 후인 94년 외국 유학 중 방학 기간을 이용해 한국에 왔을 때 <죽은 경제학자…>의 번역본을 본 적이 있다. 책의 내용이 좋아 <경제학카페>라는 책에 이 책을 소개했다. 몇몇 인용이 비슷한 것을 가지고 표절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발상”이라고 일축했다.
유 의원은 이번 표절 시비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일고의 반박할 가치도 없는 억측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을 것”라는 의사를 보좌관을 통해 밝히면서 “표절 의혹의 글을 올린 네티즌이나 이를 기사화한 인터넷 언론 등에 대한 법적 대응을 심각하게 검토중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사이버 세계의 표절 시비가 법정에까지 오르게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