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씨는 영화 <남부군>을 보고 감회가 남달랐다고 한다. | ||
나는 남원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광주로 와서 전남방직에 다니던 중 총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16세의 어린 나이로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석방된 후 광주로 와 병원에 취직, 그곳에서 약 3년을 간호부로 일하는 동안 나는 주사를 잘 놓기로 유명했다.
내 나이 19세 되던 해에 6·25가 발발했다. 그해에 나는 인민군에 입대했고 이후 지리산으로 입산했다. 나는 간호부로 일하면서 끊임없이 교육을 받았다. 지금의 내 남편 류낙진씨도 같은 시기에 입산하여 활동하다가 2년 만에 먼저 붙잡히게 되었다. 영화 <남부군>을 보니 감회가 깊다. 그 책에 ‘동면 면당’을 만났다고 한 것이 바로 우리들을 지칭한 것이다. 대공세 기간에 20일간을 물만 먹고 숨어 살면서 무척 고생했다.
나는 1953년 9월23일 전라북도 임실에서 허벅지, 등, 무릎, 발바닥에 총 네 방을 맞고 붙잡혔다. 그 후 지금의 남편이 복역중이던 교도소로 면회간 것이 인연이 되어 석방된 뒤 결혼하게 되었다. 내가 결혼할 당시 시동생은 겨우 일곱 살이었다. 시어머님이 계셨지만 워낙 연로하신지라 내가 키우다시피 했고, 도련님도 나를 어머니처럼 여기고 잘 따랐다.
1971년 남편이 보성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였다. 방학 동안에 제주도에 갔다온다고 며칠 집을 비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기간에 북한을 갔다온 ‘고정간첩’이라 하여 4월1일 붙잡혀 ‘반공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형을 살던 중 1988년에 20년으로 감형되어 광주교도소에 복역중이다. 남편이 정말로 ‘고정간첩’으로 활동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다. 당시 동명여중에 다니던 큰딸은 칠판에 ‘간첩 류낙진 체포’라고 씌어진 글을 보고 아버지의 구속 사실을 알고 기절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그 후 자식들이 아버지 때문에 열등의식을 갖고 좌절하지나 않을까 무척 고심했다. 자주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들과 의논하면서 자식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노력한 결과 모두 공부도 잘하고 건전한 사고방식을 지녔다. 남편 없이 30여 년을 시동생 2명과 4남매의 교육 등으로 생계유지를 위해 안 해본 일이 거의 없다. 새벽 1시에 터미널에 나가 깨죽도 팔고, 보험회사 세일즈도 하고, 들깨장사도 하여 대학까지 보내고 지금은 모두 출가시키고 막둥이 한 명만 남았다.
1980년 5월17일 자정쯤 되었을 때다. 사복형사 4명이 총을 메고 집으로 들어왔다. 당시 조선대학교 약대 4학년에 다니던 큰딸 ○○을 “한 시간만 이야기하고 보내주겠다”면서 잡아갔다. 영문도 모르는 채 끌려가는 ○○을 하도 어이가 없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삼촌(류영선씨를 지칭함)이 잠바를 입혀 보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작은딸(문근영의 어머니)이 “엄마는 딸을 잡아가도 보고만 있소?” 하고 따졌다. 그래서 내가 “총 앞에서 내가 어쩌겠냐. 악을 쓸 것이냐, 어쩔 것이냐”라고 말했다.
한 시간만 이야기하고 집으로 보낸다던 큰딸은 아침이 되어도 돌아오지 알고 아무런 연락조차 없었다. 다음날부터 온 가족이 혹시 학생시위대에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큰딸을 찾아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나 혼자만 집에 있고 심지어 2층에 살던 조선대생들까지도 큰딸을 찾으러 다녔다.
이후 도청으로 나간 삼촌도 연락이 없고 큰딸도 연락이 없어 불안한 날들을 보냈다. 총소리가 요란했던 27일을 지나 다음날부터 기독병원, 적십자병원, 전대병원 등을 샅샅이 뒤지고 다녀도 삼촌은 없었다. 그때는 병원에 있던 시체들도 다 치위지고 없었다. 도청에 가보고 상무관도 가봤지만 어디에도 삼촌은 없었다.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는 것을 보면 죽은 것이 확실한 것 같은데 시신도 찾지 못하자 더욱 상심해서 집으로 왔다. 집에 와보니 파출소에서 경찰이 왔었다고 하면서 빨리 나오라고 했다고 한다. 광주경찰서에 갔더니 사진을 보여주었다. “우리 시동생이 확실하다”고 했더니 우선 집으로 가 있으면 나중에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해서 돌아왔다.
6월6일 장례 준비를 해서 가족 두명만 시청으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시청에서 장례비로 30만원을 주었다. 우리는 시청에서 차를 타고 망월동으로 갔다. 망월동 공원묘지에는 향을 피워놓았는데도 시체 썩는 냄새가 어찌나 역하든지 구토가 나고 코가 썩을 지경이었다. 관을 열고 일일이 확인하는데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계속 관을 열고 확인해 보니 옷은 삼촌의 것이 분명한데 얼굴은 어찌나 퉁퉁 부었던지 도저히 삼촌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삼촌 친구들도 모두 도망가고 외면해 버렸다. 나는 젊었을때 징그러운 시체를 많이 봤기 때문에 그나마 지켜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삼촌의 이마 정면에 조그마한 총구멍이 나 있었다. 다리에도 상처가 있었던 것 같다. 이마에 총구멍이 뚫린 삼촌의 시신을 확인하고 “놈들이 틀림없이 확인사살을 했는갑다”고 악을 쓰면서 통곡했다. 자식처럼 키운 삼촌을 내 손으로 묻고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후 이사를 해버렸다.
언젠가 보험회사에서 일을 보고 나오는데 자가용이 와서 나를 강제로 태웠다. 효죽동 파출소였다. 그들은 우리 삼촌이 “5·18 당시 교도소에 복역중인 형님을 찾기 위해 교도소를 11번이나 습격한 폭도”라고 했다. 나는 “우리 삼촌은 형사들이 내 딸을 잡아갔기 때문에 조카를 찾는다고 날마다 시내에 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교도소를 습격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내가 한 말은 믿지 않고 폭도라고 몰아붙였다.
그 후 잡혀간 큰딸이 송정리파출소에 있다는 연락을 비공식적으로 해줘 알게 되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조차 모르고 지냈던 딸이 송정리에 있다니 정말 반가웠다. 큰딸은 5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나왔다. 그 후 한 달에 두 번은 형사들이 찾아와서 “○○은 요즘 어떻게 지내냐.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느냐” 등등 감시가 무척 심했다.
또 막내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 때 5·18 관련 유인물을 뿌린 사실이 발각되어 경찰서로 잡혀간 일이 있었다. 형사가 우리 아들을 때리자 그 아이가 순순히 맞는 것이 아니라 악을 쓰며 반항했는가 보다. 그 뒤로 더 이상의 구타는 당하지 않았고 유인물 관계로 구류를 살고 나왔다. 우리 집이 이렇듯 복잡하다.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