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토지>의 한 장면. 서희 모친과 하인 구천이가 불륜을 저지르고 만다. | ||
일제강점기 초기였던 당시의 형사 사건을 살펴보면 살해 및 강도, 강간, 간통, 강·절도, 사기 사건 등이 총 망라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화폐 위조와 도박, 문서 위조, 횡령, 마약, 사체 손괴, 모욕 사건 등도 포함돼 있었다.
1910년대 초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사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도 가히 엽기적인 사건이라 불릴 만한 남녀의 치정에 얽힌 사건들도 다수가 눈에 띄었다.
▲심아무개씨와 황아무개씨(여)는 8년 전부터 서로 정을 통해온 불륜의 관계였다. 이 같은 사실을 눈치 챈 황씨의 남편이 어느 날 살해되었고, 심씨와 황씨는 간통 및 살인죄로 체포되었다.
당시 원심에서 확정된 피고 두 사람의 범죄 내용에 따르면 사건 개요는 이렇다. 심씨는 황씨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수십회에 걸쳐 정을 통해왔다. 그런데 황씨의 남편이 이상한 낌새를 차리고 자꾸 황씨를 의심하기 시작하자 두 사람이 더 이상 불륜 관계를 지속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결국 두 사람은 황씨의 남편을 살해하기로 공모했다. 결국 어느 날 황씨의 남편이 술에 취해 돌아오자 둘이 합세하여 식칼로 남편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심씨는 “1911년 음력 9월7일 귀가하는 도중 황씨 집 앞을 지나가려고 했을 때 황씨가 지나가는 나를 불러 ‘어제 밤중에 부부싸움 도중 대패로 남편을 살해했는데, 빨리 매장하지 않으면 내 생명이 위태롭다’고 애타게 부탁해와서 그녀의 딱한 사정만 생각하고 매장을 함께 해주었을 뿐”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반면 황씨는 “남편이 1911년 음력 9월19일 밤 도박장에 간다고 집을 나간 후 수개월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아이와 함께 남편을 찾아 나섰다. 음력 12월27일 아이가 죽산군 산중에서 부패된 시체 1구를 발견하면서 그 곳에 칼이 같이 하나 있었는데 그 칼이 남편 것이 틀림없어 신고하였다. 심씨는 8년 전에 한 번 관계를 맺었을 뿐 그 이후에는 정을 통하지 않았다”는 또 다른 주장을 폈다.
하지만 고등법원은 두 사람의 주장에 대해 “피고인들의 상고 내용은 모두 그 이유가 없다”며 기각했다.
▲황해도의 김아무개씨는 곽아무개씨와 평소 술을 함께 자주 마시며 어울렸는데, 특히 곽씨의 아내 노아무개씨가 거처하는 방에서 술을 자주 마셨다. 그런데 어느날 노씨에게 고용된 매춘 여성 임아무개씨가 경찰서에 “노씨로부터 화대를 많이 뜯기고 구타당했다”고 신고하여 결국 노씨의 남편 곽씨가 수감되었다(노씨는 당시 방을 빌려 매춘 여성들을 고용한 일종의 ‘포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노씨는 김씨에게 “15원만 주면 남편을 석방시킬 수 있다”고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김씨가 이를 거절하자 두 사람의 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소원해졌다. 그로부터 여러 날 뒤인 1911년 7월8일 김씨는 술에 조금 취한 상태에서 노씨의 방에 찾아 들어갔다. 여기서부터 고소인 노씨와 피고소인 김씨의 주장이 엇갈린다.
노씨측은 김씨가 자신을 겁탈할 목적으로 방에 몰래 들어와서 덮쳤다는 주장을 폈고, 당시 주변에 있던 다른 여성들이 이를 증언했다. 하지만 김씨는 “돈을 못 빌려준 미안한 마음도 전할 겸 술도 팔아줄 겸 해서 들어갔더니 노씨가 누워 있길래 장난기가 발동하여 ‘사람이 찾아왔는데 누워만 있느냐’며 이불을 살짝 걷고 소매 끝을 건드린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김씨측은 또 “노씨가 매음녀(賣淫女)로서 색주가(色酒家)를 업으로 삼고 있는 것은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런 창녀를 품행이 바른 부녀자와 동일시하여 판결한 원심은 부당하다”고 상고했다.
이에 대해 고등법원은 “여자의 방을 남자가 혼자 침입하여 들어간 죄가 인정되고, 노씨를 매음녀로 볼 수 없고, 설사 매음녀라 하더라도 승낙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강간에 이르게 됐을 때에는 부녀자에 대한 경우와 마찬가지 죄가 적용된다”며 원심 2년 6월형을 확정했다.
▲한국인 유부녀와 정을 통한 일본 남성이 13세의 어린 한국인 남편으로부터 간통죄로 고소를 당한 흥미로운 사건도 있었다.
평안도에 사는 송아무개씨는 1907년 11세의 어린 나이에 18세의 김아무개씨(여)와 결혼했다. 당시 조선 시대의 조혼 풍습이 남아 있던 때였으나, 신랑이 너무 어린 나이여서 두 사람은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10년 20세가 넘은 성숙한 여인이 된 김씨 앞에 일본인 가와하라가 등장했고 이내 두 사람은 정을 통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일본인 가와하라는 당시 조선의 조혼 풍습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특히 남자 구실도 못하는 어린 신랑 송씨를 남편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기에 별다른 죄의식도 가지지 못했다. 간통죄로 송씨측에 고소당하자 가와하라측은 “민법상 남자는 만 17세, 여자는 만 15세가 되지 않으면 혼인이 성립안되고, 혼인은 또 호적담당 공무원에 신고함으로써 그 효력이 발생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송씨와 김씨는 법적 부부 관계로 볼 수 없으므로 간통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고등법원은 이색적인 판결로 가와하라의 상고를 기각했다. 당시 판결문 내용을 보면 “조선인 사이에는 당사자의 연령 여하에 관계없이 혼인을 하고 또 그 혼인이 유효하다는 것은 본원도 인정하고 있다”며 “고소인 송씨가 당시 만 13세라 하더라도 의사능력이 있고 사리 분별 능력이 있음이 인정되므로 고소는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며 간통죄를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