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공개된 문건은 전체 1백61권 가운데 5권에 불과하다. 청구권 외에도 당시 한일회담에서는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 문제와 어업권 문제, 그리고 문화재와 독도 문제까지도 모두 논의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추가 자료도 내부 검토를 거쳐 순차적으로 모두 공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학계에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문서 중에 청구권 문제보다 더 큰 ‘뇌관’이 숨어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미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한일회담 관련 비공개 문건 복사본이 은밀히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와 향후 공개에 따른 파장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 실제 비공식적으로 몇 권의 문서가 유출되었다는 소문도 있고, 일본에서 입수됐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지난해 9월에는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와 참여연대에서 ‘최초 공개’라며 5차 회담 자료 가운데 청구권 관련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다.
<일요신문>은 여러 경로로 수소문한 끝에 소문 속에 떠돌던 약 1천8백여 쪽에 달하는 5·6차 한일회담 문서를 입수했다. 이 자료를 검토한 바 있다는 모 대학의 교수 A씨는 “일본의 도쿄대학 도서관에 관련 자료가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일부 학자들이 관련 문건을 입수해서 돌려 본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그 출처를 밝혔다.
기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문서에는 이미 지난 17일에 공개된 6차 회담의 청구권 관련 문서와 지난해 9월 유족회측에서 최초 폭로한 5차 회담의 청구권 관련 내용은 물론, 이외에도 한일 양측 대표의 정치 협상 및 예비 절충 회담, 어업·법적지위·문화재 관계 회의 등 자세한 내용이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자료를 통해 5차 회담에 나선 장면씨의 민주당 정권과 6차 회담에 나선 박정희 정권의 회담에 임하는 분위기의 변화도 엿볼 수 있다.
A교수는 “청구권은 돈과 관련된 문제라서 지금 민감하게 부각되지만, 앞으로 ‘기본조약’에 관한 내용이 공개되면 엄청난 파장이 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당시 한국측이 무력으로 강제합방을 한 데 대해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지 못하고 ‘무효 선언’이라는 어정쩡한 표현을 제시함으로써 결국 일본에게 명분을 주는 대목이 6차 회담 문서 내용에서도 일부 엿보인다”면서 “실제 65년 6월22일 협정한 양국의 기본조약에서도 ‘한일합방은 무효이다’라는 문구를 써넣는 것에 그침으로 해서 오늘날 과거 반성의 뜻이 전혀 없이 계속 망언을 하는 일본을 지켜봐야 하는 불행한 유산을 남기고 말았다”고 비난했다.
실제 이번에 입수된 6차 회담 자료를 살펴보면 기본조약에 관한 언급이 두 차례 정도 등장한다. 처음 등장한 것은 62년 9월6일 5차 예비절충회담 때였다. 한국측이 먼저 “기본 조약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언급하자 일본측은 “좀 더 있다가 토의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 문제는 간단한 것이므로 일주일 정도의 토의로 충분할 것이다”라며 즉답을 피했다.
62년 12월20일 21차 예비절충회담에서 한국측은 “기본조약에서 1910년 이전의 구 한국정부와 일본 제국 정부 간의 모든 조약 협정의 무효 선언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라고 처음으로 다소 구체성을 띠어서 언급했다. 하지만 무효라는 표현만 썼을 뿐, 사과를 요구하는 대목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런 분위기도 만들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또다시 “이 문제는 제 현안에 대한 토의가 끝맺어질 무렵에 가서 논하기로 양해가 성립되고 있었는 바…”라며 어물쩡 다음 사항으로 넘기고 있다.
이외에도 현재 비공개로 분류돼 있는 당시의 여러 회담 내용을 살펴보면 시종일관 일본의 자세가 기세등등했음을 엿볼 수 있다.
한국의 청구권 요구에 대해 일본측은 “한국은 일본에 대한 교전국도 평화조약의 서명국도 아니므로 일본에 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없다”고까지 주장하기도 했다.
63년 2월13일 열린 문화재 문제 협상에서도 일본측은 아예 회담 첫머리서부터 “우리 문화재 전문가들은 처음부터 한국의 문화재를 돌려주는 데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이번 회합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 문화재를) 확인한 것은 반환 내지는 증여한다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우리측의 결정을 위한 참고 자료로서만 생각하겠다는 것임을 확실히 해둔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해 우리측은 “일본에 와 있는 한국 서적 중 일본이 아무래도 반환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마이크로 필름이라도 만들어 줘서 한국 학자가 이를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의 불안한 정국과 함께 박정희 의장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불확실한 거취를 협상의 유리한 국면으로 이용하려는 듯 회담에 임할 때마다 수시로 국내 정세를 거론하는 모습도 보였다.
63년 1월28일 회담에서 일본측은 “우리 정부는 김 부장을 상대로 교섭을 해왔기 때문에 김 부장이 실각할지도 모른다는 (한국) 보도에 접했을 때는 일본은 앞으로 ‘반 김부장파’와 교섭을 해야 하게 되는 줄 알고 우려하고 있다”고 표명하기도 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