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 8월18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후 사저로 오고 있다. [80년 보도사진연감] | ||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박동진씨는 “12·12 사태 이후 내가 최 대통령권한대행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you하고 같은 province(지역) 출신 장군 몇 사람과 시간을 보냈다’고만 말하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는데, 원래 그가 이야기를 잘 안하는 성격으로 12·12 밤 자신의 불안했던 기분을 위와 같은 식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박씨는 대구 출신이다.
12·12 사태 당시 신군부가 최 대통령에게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 재가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최 대통령이 보인 불쾌감과 역사의식도 밝혀졌다. 당시 최 대통령은 노재현 국방장관이 들고온 서류를 대강 검토한 후 이례적으로 사인 옆에 일자와 시간을 기입했다. ‘신군부가 사전 재가 없이 정 총장을 연행한 것은 엄연히 불법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 또한 당시 최 대통령은 신군부의 재가 종용에 대해 당시 불쾌한 표정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국보위 출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당시 총무처 총무국장으로 있던 송영언씨는 “청와대 대접견실에서 (국보위 임원) 임명장 수여식이 있을 때 내가 최 대통령 바로 옆에 서 있었는데, 당시 최 대통령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한 사람도 얼굴을 보지 않고 악수도 하지 않았으며, 경례를 할 때도 계속 바닥만 보고 있었다. 임명장 수여식이 끝난 후 다과회가 있었는데 최 대통령은 잠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고 전두환 상임위원장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나눴다”고 진술했다.
관련 기록에는 당시 최 대통령이 광주에 직접 내려와서 광주 시위군 대표와 직접 담판 협상을 시도하려 했다가 군부측의 만류로 무산된 일화도 소개됐다. 당시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이었던 김순현씨는 “80년 5월25일 최 대통령이 직접 광주 전교사 소회의실에서 도지사와 군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나와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이 현 상황보고를 한 후에 수습작전계획(광주 재진입 작전)을 보고드리자 재가하지 않고 ‘내가 도청으로 가서 시위자 대표와 직접 담판을 짓겠다’라고 하며 나가려 했다. 그러자 당시 대통령을 수행한 국방부 장관 등이 ‘만약 도청에서 시위대들에게 납치가 된다면 그 즉시 북괴가 남침할 것이니 안된다’고 만류했다”고 진술했다.
김씨에 따르면 최 대통령이 끝내 진압 작전에 대한 재가를 하지 않고 상경하자, 이후 서울의 육본에서 ‘향후 광주지역 수습작전에 대한 모든 책임을 현지 사령관(소준열)에게 위임한다’는 전문이 왔다고 한다.
한편 당시 국방장관이던 주영복씨가 조사과정에서 검사와 나눈 대화를 보면 의미심장한 대목이 발견된다.
‘검사(검): 최 대통령의 하야 소식은 언제 알았나.
주영복(주): 8월15일 2시경 대통령이 따로 불러서 하야 뜻을 밝혔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을 한참 흘렸다.
검: 그때 최 대통령의 눈 부위 등에 폭행을 당한 자국이 있지 않았나.
주: 당시에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모르지만 한쪽 눈이 부자연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검: 그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나.
주: 그 전에는 한 쪽 눈이 부자연스러웠던 것을 본 적이 없다.’
최 대통령의 하야 뒤에 신군부의 ‘물리력’이 존재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