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2002년 동남아의 모처에서 문화일보 기자였던 도올과 만났을 당시 모습. 사진제공=문화일보 | ||
그런데 지난해 말 대우 출신 CEO들이 그룹 몰락 뒤 처음으로 대규모 모임을 가지면서 대우 명예회복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또한 옛 대우 임원급 인사들이 ‘대우인회’라는 친목모임을 결성한 뒤 세계경영포럼을 매달 개최해 대우 부활의 이론적 토대를 쌓고 있다. 이런 까닭에 대우 출신 인사들이 김 전 회장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정치권에선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 등 연세대 인맥들이 동창회장 출신인 김 전 회장 귀국에 호의적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밖에 학계에서도 대우그룹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김 전 회장 귀국의 선결 조건은 채권단 손해배상 등 법적인 문제 해결과 대우 사태 당시 경제 관료들이 여전히 건재해 있어 그들과의 ‘교통정리’도 필요하다. 김 전 회장은 과연 귀국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봤다.
“나는 일 벌이기를 좋아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89년 내놓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한 대목이다. 김 전 회장은 현재 5년째 해외를 떠돌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41조원의 초대형 분식회계 사건의 ‘주범’ 꼬리표를 달고 형극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학계를 중심으로 대우그룹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김 전 회장의 귀국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이 조성되고 있다.
재계의 한 고위 인사는 “지난해 말에 경제관계 장관을 만났는데 ‘김 전 회장을 재평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교수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히면서 “김 전 회장의 귀국론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김 전 회장이 주창한 ‘세계경영’에 대해 연구해 오고 있었다. 지난 98년 3월 대우가 몰락하기 전 <세계가 열린다, 미래가 보인다>라는 책이 출간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의 집필에 참여한 필자들을 중심으로 현재까지도 세계경영에 대한 재조명과 김 전 회장의 귀국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책 집필에 참여한 학자는 서재명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송일 한국외국어대 무역학과 교수, 김동재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이우용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 김재일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최종연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김준석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용세중 아주대 경영학부 교수, 곽수일 서울대 경영대학장 등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K교수와 S교수 등 김 전 회장과 친분이 있는 교수 몇몇은 지난해 말 정부 고위 관계자들과 만나 김 전 회장의 재평가 및 귀국론을 제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노무현 정권의 ‘친 연세대’ 인맥도 김 전 회장의 귀국설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요인으로 볼 수 있다. 김 전 회장은 지난 60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87년부터 연세대 상대 동창회장을 맡아왔다. 그리고 지난 95년에는 연세대 총동창회장으로 선출돼 99년 출국 전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바 있다.
이러한 김 전 회장과 연세대의 인연 때문에 최근 노무현 정권의 연세대 인맥이 그의 귀국에 적극적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연세대 총장을 지낸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은 김 전 회장이 동창회장으로 있을 때 대외 부총장으로 재직하며 교류를 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실장은 지난해 말 경제 단체장들을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관행적으로 탈법적인 경제활동을 했던 일부 기업인들에 대한 대 사면 얘기도 오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해온 이광재 열린우리당 의원도 김 전 회장 귀국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김만수 청와대 부대변인은 “(김 전 회장의 귀국-사면설에 대해) 전혀 들은 바 없다”면서 “관련 부처(검찰)에서 처리할 문제”라고 밝힌 바 있다.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도 김 전 회장 귀국에 대해 적극적이다. 박 의원은 지난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김 전 회장에 대한 사면을 촉구한 바 있다. 사실 그는 지난 2003년 7월 말 지인을 통해 동남아에서 김 전 회장을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박 의원은 이에 대해 “김 전 회장은 이미 정치적으로 사형을 당했고 건강이 악화된 만큼 이제는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만약 정부의 정치적 사면이 이루어져 재기한다면 과거 대우가 전 세계에 심어 놓은 네트워크가 되살아나 우리 경제에도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전 회장은 지난 90년 대 말 도올 김용옥씨, 소설가 이문열씨, 장기표 나라구하기국민운동 추진본부 대표 등과 함께 세계여행을 한 일이 있다. 사회 각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인 이들도 김 전 회장의 경제적 업적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하고 있다. 특히 김 전 회장의 오랜 친구인 도올 김용옥은 지난 2002년 12월 <문화일보>에 김 전 회장의 인터뷰와 근황을 최초로 전해 그의 ‘처지’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을 이끌어내는 등 김 전 회장의 귀국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학계에서도 김 전 회장에 대한 재조망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작가 안혜숙씨는 지난해 김 전 회장의 인생 역정을 소설화한 <잃어버린 영웅>(찬섬 간)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한다. 작가 안씨는 “김 전 회장과 대우는 국가경제의 한 축으로 우리 경제의 성장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게 사실”이라고 밝히면서도 “소설과 김 회장의 귀국과는 연계하지 말아달라”며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김 전 회장의 해외 인맥도 그의 귀국에 적극적이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말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을 때 그곳 대통령 나자르바예프가 김우중 전 회장의 거취를 물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귀국설이 확산되기도 했다. 그 뒤 11월에 김 전 회장은 중국 베이징을 극비리에 방문했는데 과거 친분이 두터웠던 중국동포 출신 조남기 전 인민해방군 장군과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김 전 회장은 중국의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의 장남인 덩푸팡 중국장애인연합회 주석과도 개인적 친분이 두텁다고 한다. 그래서 덩푸팡은 지난해 한국의 한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 ‘승패로 영웅을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김우중 선생은 식견과 능력을 겸비하신 분으로서 재기에 성공하시리라 믿고 있습니다’는 두 가지 기원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국내외에 있는 김 전 회장 지인들의 움직임 중에서도 ‘대우가족’의 활동이 가장 눈에 띈다. 대우의 전현직 임원들은 지난해 10월 말 김 전 회장의 부인 정희자씨 등이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포천 아도니스 골프장에서 대우 몰락 뒤 처음으로 대규모 회동을 가져 ‘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대우의 전현직 임원 모임인 ‘대우인회’(회장 박태웅 전 대우자동차 부사장)는 지난해 4월부터 세계경영포럼을 결성해 한 달에 한 번 꼴로 강연회를 열고 있다. 세계경영포럼은 대우그룹의 재조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김 전 회장 귀국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쌓고 있다는 분석도 나와 김 전 회장의 귀국론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한편 김 전 회장 귀국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대우그룹 홍보이사를 지내다 최근 유진그룹 홍보담당 전무로 자리를 옮긴 백기승씨는 “김 전 회장의 귀국에 대한 당위성은 있지만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는 대우의 부활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룹 해체과정이 정당했는지 재조명해보자는 것”이라고 밝히면서 “김 전 회장의 명예회복이 우선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에서 김 전 회장의 거취를 두고 청와대와 정부의 여론을 탐색했으나 경제 고위 관계자 등이 부정적 의견을 전달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여기에 채권단의 손해배상 소송 등 법률적인 문제도 그의 귀국 길을 더디게 하고 있다.
한편 김 전 회장은 지난 2001년 대검 중수부에 의해 기소중지된 상태로 현재 독일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한 측근은 “부인 정희자 여사가 서울과 독일을 오가면서 장협착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김 전 회장을 돌보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