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건기록 속 의문들 현대그룹과 DJ정권의 비자금 연결창구라는 의혹을 받았던 무기거래상 김영완씨의 이름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오른쪽은 김씨의 평창동 집 떼강도 사건과 관련, <일요신문>이 입수한 수사기록들. | ||
김씨는 검찰이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기소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진술을 했던 장본인. 그러나 대법원이 “현대 비자금을 박 전 실장에게 전달했다”는 김씨의 진술을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당시 현대측이 제공했던 비자금의 행방을 둘러싸고 또 다시 의문이 싹트고 있다.
김씨는 지난 2003년 검찰이 현대 비자금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자 미국으로 출국해 현재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태. 현대그룹과 DJ정권의 ‘자금 연결 창구’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그가 귀국하지 못하는 ‘배경’ 또한 의혹으로 남아 있다.
검찰은 이번 파기환송심에서도 지난 1, 2심 재판 때와 마찬가지로 현대그룹으로부터 1백50억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뇌물)로 기소된 박지원 전 실장과 김씨의 ‘특수한’ 관계를 입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실제로 검찰은 김씨가 박 전 실장에게 소개시켜 주었다는 무속인을 증인으로 법정에 세우는 등 김씨의 숨겨진 과거 행적에서 새로운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김씨의 ‘과거’에 무게중심이 쏠리면서 자연스럽게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지난 2002년 3월 김씨의 자택에서 발생한 떼강도 사건. ‘김영완씨 자택 떼강도 사건’은 김씨의 전직 운전사 등 총 9명이 공모, 김씨의 평창동 자택에서 약 1백억원 상당의 현금과 채권을 강취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사건 발생 1년 3개월 후에서야 외부에 공개됐고,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후 몇몇 경찰 수뇌부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파견중이던 박아무개 경감의 ‘요청’을 받고 극비 보안 수사를 펼친 사실이 밝혀지면서 경찰 수사 과정과 강취당한 채권의 출처 등을 놓고 적잖은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검찰은 박 경감이 박 전 실장 및 김씨와 친분 관계가 있는 것으로 경찰 감사 결과 드러났다는 점에서 3년 전 일어난 떼강도 사건을 김씨와 박씨의 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변수로 보고 있다. 실제 검찰은 지난 1월25일과 2월22일 파기환송심 공판에서 박씨에게 이 사건과 관련한 내용을 집중 신문한 바 있다.
<일요신문>은 지난 2002년 3월 발생한 ‘김씨 평창동 자택 떼강도 사건’의 수사 기록 일부를 최근 단독입수했다. 이 수사 기록에는 사건 발생 이후 순차적으로 검거된 범인 8명 중 일부의 진술서와 경찰의 사건 수사 보고서, 검찰의 공소장 등이 첨부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김영완 떼강도 사건’의 스토리를 재구성하고 남겨진 의문점을 짚어봤다.
검·경 수사 기록에 따른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김씨 자택에서 2000년 6월부터 2001년 5월까지 운전기사로 근무한 K씨(43)가 개인 부채 등을 해결하기 위해 김씨를 상대로 강도를 결심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K씨가 2001년 6월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권아무개씨(41)를 만나는 자리에서 “내가 운전사로 있던 김씨의 집에 현금이 많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본격적인 범행 모의가 이루어졌다.
평소 빚이 많던 권씨는 K씨의 말을 듣고 범행을 결심했다. K씨는 권씨가 적극적으로 범행 의사를 보이자 김씨의 자택 구조 등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주고, 자신은 정보제공의 대가로 배당금을 받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후에 집행유예로 풀려난 K씨는 “운전사들끼리 사장들 흉을 보다가 나온 이야기를 권씨가 듣고 날 끌어들인 것”이라며 공소 사실을 전면 부인한 바 있다.
K씨와 만난 후 수개월간 ‘작전모의’를 해오던 권씨는 범행 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 자신과 전혀 안면이 없는 전문 절도범들을 범행에 가담시키기로 마음먹고 공범들을 수소문했다. 권씨는 2002년 3월 초순 지인을 통해 곽아무개씨(48)를 소개받았으며, 곽씨는 곧바로 최아무개씨(47)라는 유통업자를 통해 군산의 근거지를 두고 조직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 현아무개씨(45)를 끌어들였다.
마치 다단계 판매를 연상시키듯, 현씨는 동료인 김아무개씨(49)를 범행에 가담시켰으며, 최씨와 김씨도 그 무렵 야간주거침입 절도미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한 장아무개씨(41)를 포섭했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김씨의 평창동 집을 현장 답사한 이들은 범행 일주일전인 3월23일 강남 논현동의 한 여관에서 최종적으로 모의를 한 뒤 역할을 분담했다. 그 후에도 현씨는 범행 이틀 전 전과 15범인 J씨(52)를, 범행 당일에는 J씨가 전과 13범인 조아무개씨(53)를 합류시켜 공범은 사건을 처음 제안한 K씨를 포함, 총 9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이 범행에 나선 것은 3월31일 일요일 오전 11시30분께. 일요일을 택한 것은 “김씨가 일요일 오전에 골프를 치러 나가고, 그 때는 운전기사도 1명만 출근한다”는 K씨의 귀띔 때문이었다. K씨와 최씨를 제외한 7명은 범행 당일 오전 7시 논현동 여관 앞에 집결해 무전기, 식칼, 과도를 소지하고 등산복으로 갈아입은 뒤 곽씨가 준비한 봉고차를 타고 김씨 집으로 향했다.
김씨의 운전기사가 대문 밖에서 세차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잠시 숨을 고른 이들은 운전기사가 세차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잠입을 시도했다. 무전기로 집 밖에서 망을 보는 권씨와 곽씨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은 집 대문을 드라이버로 열고 지하 1층으로 들어가 운전기사 홍아무개씨(50)를 위협, 청테이프로 손과 발을 묶었다. 대문을 뜯고 맨 처음 집안으로 잠입한 조씨는 인기척을 듣고 온 가정부 방아무개씨(49)가 반항하자 식칼자루 뒤끝으로 방씨의 머리를 내려쳐 제압했다.
그 뒤 이들은 2층으로 올라가 김영완씨와 김씨의 처, 아들을 흉기로 위협하고 김씨의 서재에서 가방 6개를 강탈해 달아났다. 이들이 훔친 액수는 현금 약 7억원, 미화 약 5만달러(약 6천5백만원), 엔화 약 3백50만엔(약 3천4백만원), 1백만원 자기앞수표 24장, 국민주택채권 3백36장, 고용안정채권 15장 등 약 1백억원에 이르렀다. 김씨 집에서 빠져나온 일당들은 화곡동에 사는 곽씨의 동거녀 집으로 모여, 그곳에서 훔친 돈과 채권 등을 분배한 뒤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까지가 검·경 수사 기록상에 공통적으로 기재된 사건의 줄거리다.
1.피의자 검거순서 아리송
경찰의 수사는 철저한 보안을 유지한 채 이루어졌다. 사건 발생 1년 3개월 후인 지난 2003년 6월23일에서야 관할인 서대문경찰서가 뒤늦게 김씨의 떼강도 사건을 공식 발표한 까닭에 이전의 수사 상황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간 서대문경찰서가 공개한 내용은 ▲범행 다음날인 4월1일 김씨가 현금 2천4백만원을 강도당했다고 신고해 수사가 시작됐으며 ▲김씨는 4월11일에만 경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는 것뿐이다.
경찰 수사 기록에는 김영완씨가 경찰 조사에 응한 뒤 보름이 지나면서 공범들이 하나둘씩 검거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먼저 권씨가 4월25일 오후 10시에 검거됐으며, 곽씨가 25분 차를 두고 덜미를 잡혔다. 뒤이어 최씨와 전직 기사인 K씨가 각각 4월26일과 4월30일 검거되면서 사건의 전모가 일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 곽씨는 지난 2003년 6월 한 언론과의 면회를 통해 “김영완씨의 집을 털 사람을 소개해 달라는 나의 부탁을 받고 사람을 소개해준 최씨가 K씨 때문에 검거됐는데 내가 어떻게 자수를 안 할 수가 있냐”며 경찰이 밝힌 검거 경위와 시기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검거 순서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엉터리 수사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사건 수사를 맡은 서대문서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곽씨가 잘못 얘기한 것”이라며 곽씨의 말을 부인했다.
검거된 공범 4명을 통해 다른 공범들의 신원을 파악한 경찰은 5월2일자로 수배령을 내린 장씨를 5월6일 울산에서 검거했다. 가장 나중에 범행에 합류한 J씨와 조씨도 5월9일과 10일 차례로 검거됐다. 현씨와 함께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던 김씨도 6월 경찰에 검거됐다. 범행을 주도한 현씨는 유일하게 현재까지 미검거된 상태. 공소시효는 2012년 3월30일까지다.
2.정작 금고는 못털었다
수사 기록 중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공범 중 1명이 김씨 자택 금고를 털지 못했다고 진술한 부분이다. 5월9일 검거된 J씨는 그 해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 받은 뒤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이유서에서 “당시 2층에 있는 금고를 열려고 현씨로부터 지시를 받았으나 그대로 (서재 벽장에 있던) 가방만 들고 나왔다”고 진술했다.
J씨는 항소이유서에서 “겁도 나고 정신이 없던 차에 현씨가 나더러 부인이 2층 금고 열쇠가 있으니 부인을 데리고 가서 금고를 열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어떻게 이 자리를 모면할 수 있을까라고 궁리하던 중, 마침 벽장에서 꺼내 놓은 가방이 있어 먼저 이것을 옮겨 놓겠다고 밖으로 나왔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범행 준비 과정에서 K씨로부터 김씨의 자택 내부 사정을 구체적으로 들은 ‘주범’ 현씨가 금고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점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현씨가 K씨로부터 금고에 상당한 액수의 현금과 채권이 보관되어 있다는 귀띔을 받았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인 셈이다. 만약 J씨가 금고 문을 열었다면 피해 액수를 도저히 점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과연 김씨의 금고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3.피해액 절반으로 축소?
사건 담당인 서대문경찰서가 아닌 강남경찰서가 공범 두 명을 검거한 수사 기록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공교롭게도 J씨와 장씨는 범행 나흘 전인 3월27일 A변호사의 역삼동 집에 잠입, 금품을 훔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건으로 경찰에 수배된 이들 중 J씨는 5월9일 고속도로 검문에서, 조씨는 J씨의 제보로 청량리에서 덜미를 잡힌 것이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강남경찰서가 J씨와 장씨의 진술을 토대로 조사한 총 피해 액수와 서대문경찰서가 수사한 총 피해 액수가 크게 차이 난다는 점.
강남경찰서 형사과 수사진이 작성한 수사 보고서에는 J씨와 조씨가 ‘평창동 주택가(김영완 자택)에서 현금 11억원과 채권 2백억원을 강취하여 공범 9명이 나누어 가졌다’는 진술을 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단순히 피의자 진술을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지만 서대문경찰서가 조사한 피해 액수 1백억보다 최소 2배 이상 차이가 나는 셈이다.
더군다나 강남경찰서 수사진이 5월10일 작성한 조씨의 신문 조서에는 조씨가 일당 7명이 현금을 1억7천만원씩 나누었다는 진술이 포함돼 있다. 7명이 현금 1억5백만원씩 나누었다는 서대문경찰서의 수사 내용과 큰 차이가 난다.
또한 J씨와 조씨를 신문하던 강남경찰서 수사진이 평창동 사건의 추가 진술을 확보하고 강력 1반장 등 형사 세 명이 김영완씨의 집을 방문했으나 김씨의 연락처도 알지 못하고 되돌아온 기록 역시 ‘아이러니’하다. 같은 경찰이지만 강남경찰서에는 전혀 협조를 하지 않은 것이다.
수사 보고서에 따르면, 김씨의 집을 방문한 형사들이 출타중인 김씨의 연락처를 가정부와 운전사에게 물었으나 김씨의 연락처를 아예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보고서에는 “강력 1반장이 운전사에게 명함을 전해준 뒤 경찰서로 복귀하는 도중, 김씨에게 전화가 왔으나 김씨는 ‘서대문경찰서 강력2반에 신고했고, 나는 지방에 급히 내려가야 할 일이 있어 만날 수 없다’고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특히 강남경찰서는 서대문경찰서 강력2반에 공조수사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으나 서대문경찰서에서 독자적으로 수사하겠다고 해 관내 사건만 처리하고 피의자들을 서대문서에 넘긴 것으로 드러났다.
4.4백50만원쯤은 푼돈?
몇몇 공범들의 진술을 보면 김씨가 강취당한 현금 중 일부를 오히려 범인에게 되돌려준 것으로 나타난다.
J씨가 1심 재판을 앞두고 재판장 앞으로 보낸 탄원서에서 “범행 이후 배분받은 돈에서 내가 쓰고 남은 돈 4백50만원과 숨겨 놓은 채권을 피해자(김영완)에게 돌려주니까 피해자가 ‘돈은 가지고 있다가 필요한 곳에 쓰라’며 돈을 돌려준 뒤 채권만 회수해갔다”고 진술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김씨가 현금보다는 강취당한 채권의 회수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인 셈이다.
검찰에 따르면 현대측이 김씨를 통해 DJ정권의 실세였던 권노갑 전 고문과 박지원 전 실장에게 거액의 비자금을 전달한 시기는 2000년 1월과 3월, 그리고 4월. 그런데 그로부터 2년이 흐른 2002년 3월 강도 사건 당시에도 김씨는 최소 1백억대의 현찰과 채권을 6개의 가방 속에 차곡차곡 담아 서재에 보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과연 이 ‘돈가방’들은 누가 누구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을까. 이 같은 의문들이 풀리지 않는 한 평창동 떼강도 사건은 여전히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