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던 당시 모습. | ||
지난 11일 정년퇴임한 김영일 전 헌법재판관은 퇴임사에서 정치권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했다. 김전 재판관은 우선 여권이 헌재가 내린 수도이전 위헌결정을 비판한 것에 대해 “헌재가 내린 중요한 결정들을 폄하한 지각없는 행위를 한 사람들이 있다”며 “이들이 진정 나라를 위하고 헌법을 수호하며 국민 의지를 대변하는 사람들인지 대단히 의심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 여권 일각에서 보수적 판검사 출신 일변도인 헌재의 구성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에 대해서도 강경한 어조로 “잘못된 생각”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헌법재판관은 오랜 세월 법을 해석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며 흔들림없이 헌법정신을 찾아온 법률가만이 할 수 있으며 법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이 대신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사시 5회로 1970년 법조계에 첫발을 디딘 뒤 99년 부산지법원장 재직중 대법원장 지명 몫으로 헌법재판관이 된 김 전 재판관은 재판관들 중에서도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로 분류돼 왔다.
실제 김 전 재판관은 수도이전 헌법소원에서도 ‘관습헌법론’으로 우회적으로 위헌 결정을 도출한 다수 재판관의 의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정색하고 위헌이라는 소수의견을 냈다. 관습헌법까지 거론할 필요도 없이 수도이전은 헌법상 국민투표권을 침해한 명백한 위헌이라는 주장이었다. 또 지난달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 때는 “호주제는 오랜 전통과 현실에 기초한 합헌”이라는 소수 의견을 내기까지 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25일 퇴임한 변재승 전 대법관도 퇴임사를 통해 정치권을 향해 쓴소리를 남겼다. 그는 “사법권 독립과 법의 지배를 이루고자 하는 사법부 노력에 대해 반드시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주위의 시선이 느껴진다”며 사법부를 둘러싼 최근의 상황에 불만을 토로했다. 이어 변 전 대법관은 “그러한 시선의 근저에는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사법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 사법현상에 대한 왜곡이나 와전, 편향된 사고에 근거한 오해가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때도 있다”고 언급했다. 법원이 최근 잇따라 여당 의원들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당선무효형을 선고하자 여권이 “편파적 판결”이라며 노골적으로 반발했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얘기다.
사실 사법부의 최고 수장이자 우리 사회의 원로라 할 수 있는 대법관들은 퇴임하면서 법원과 나라에 대한 애정어린 충고를 해왔던 것이 관행이다. 그러나 이 같은 관행은 현정부 들어서 사법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터져나오면서 ‘쓴소리’들로 바뀌고 있고 그 물꼬를 튼 인사는 2003년 사법파동 직후 퇴임한 서성 전 대법관이다.
당시 사법부는 서 전 대법관의 후임 대법관 지명을 앞두고 개혁인선을 주장하는 젊은 법관들이 연판장까지 돌리는 사상 유례없는 홍역을 치렀다. 이에 서 전 대법관은 그해 9월 퇴임 강연에서 “법조인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국민과 더불어 법조인은 큰 기대에 차 있었으나 현실은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고 있다”고 주장,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또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사법부는 동네북이 된다”며 “모든 분야에서 개혁과 변화는 필요하지만 대의와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정부가 추진중인 사법개혁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얘기한 것이다.
▲ 김영일 전 재판관 | ||
한나라당은 김영일 전 헌법재판관의 발언에 대해 전여옥 대변인이 성명까지 내면서 환영했다. 전 대변인은 “김 전 재판관의 고언은 법치주의를 뒤엎겠다는 여권의 위험한 발상에 대해 법이 지배하는 세상을 외친 커다란 울림”이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반면 비판의 직접적인 대상이 된 여권은 이례적으로 반응을 극히 자제하고 있다. 섣불리 대응했다가는 사법부를 더욱 압박하는 것으로 비춰져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특히 여권으로서는 9월 신임 대법원장 지명을 앞두고 사법부와 최대한 대립각을 적게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대법관 13명 전원과 헌법재판관 9명 중 3명을 지명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는 대법원장을 제대로 골라 전세를 한꺼번에 역전시킬 수 있는데 굳이 미리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국 칼자루는 차기 대법원장에 대한 지명권을 갖고 있는 여권에 있다는 계산이다.
특히 최근들어 대세는 칼자루를 쥔 쪽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라는 이치가 법원 내에서도 어느정도 현실화되는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다. 그동안 여당 의원들에게 상당히 가혹한 판결을 내려온 법원이 잇따라 흐름과 배치되는 선고를 했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광주고법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당선무효형인 벌금 1천만원을 선고받은 열린우리당 한병도 의원에 대해 의원직 유지가 가능한 벌금 80만원으로 깎아 주었다. 1심 재판부가 검찰이 구형한 벌금 3백만원보다 훨씬 많은 벌금 1천만원을 선고한 것에 비해 광주고법의 판결은 극히 이례적이다.
대법원도 지난 11일 2심까지 당선무효형(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열린우리당 김기석 의원 사건을 사실상 일부 무죄취지로 파기환송했다. 김 의원은 비록 파기환송심을 거친다 해도 벌금 1백만원 이상으로 당선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만 그래도 의원직 상실은 1년 가까이 미뤄진 셈이다.
헌재도 분위기가 비슷하다. 최근 국회에서 통과된 제2의 수도이전법인 행정도시특별법에 대해 한나라당과 법조계 일각에서는 다시 한번 헌법소원을 내자는 목소리가 높지만 이번에는 위헌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이 헌재 안팎의 전반적인 분석이다. 새 법이 위헌요소를 최대한 없애기도 했지만 헌재로서도 같은 사안으로 또다시 정부의 대형 정책에 발목을 잡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최근의 사법부는 떠나는 이들은 정부와 여권에 퍼붓고 싶은 불만을 터뜨리는 반면 남아 있는 이들은 그래도 대세의 흐름에 따를 수 밖에 없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듯하다. 결국 이 같은 혼란은 오는 9월에 있을 차기 대법원장 지명 때 어느 한쪽 방향으로 정리가 될 것이라는 것이 법조계 내의 분석이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