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지 김이 생전에 찍은 사진. 안기부는 윤태식의 거짓말을 알고도 더 큰 거짓말로 수지 김 사건을 부풀렸다. | ||
수은주가 영하 15℃ 이하로 내려가는 한겨울 밤, 그가 맡은 인물이 몇 년 만에 집으로 스며들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는 대상인물의 집 들보 위 공간에 도둑같이 올라앉았다. 그리고 한밤을 정물같이 있어야 했다. 손발이 마비됐다. 시간이 흐르자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런 게 대공수사관의 생활이었다. 아니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래 전엔 철조망을 넘어 인민군 사단장을 암살하러 갔다 왔다는 선배들도 더러 있었다.
순수 대공수사팀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간첩혐의자를 지하실로 연행한 후도 쉽지 않았다. 그들 이상으로 자신도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같이 먹고 같이 잤다. 상대방보다 조금 몸이 편하면 고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중령 시절 군을 예편하고 서기관 직을 받아 수사계장을 하다가 얼마 전에 수사과장으로 승진했다.
“수사2과장! 김포공항에서 윤태식의 신병을 인수받아 조사해 봐. 북괴에 납치될 뻔했다가 귀국하는 인물이니까.”
상급자인 단장의 명령이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김 과장은 수사관 추달호를 팀장으로 3명 정도를 차출해 명령했다.
“윤태식은 반공투사시니까 일단 정중히 모셔.”
“알겠습니다.”
추달호 수사관이 대답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추 수사관이 윤태식을 수사국으로 데리고 왔다. 밤이 늦었다. 그들은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가져다 먹이고 잠을 재웠다. 다음날 조사가 시작됐다. 몇 시간도 채 안돼서 추 수사관의 보고가 올라왔다. 윤태식은 북한과는 관련 없는 단순살인범이라는 것이었다. 보다 철저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수사과장은 윤태식을 지하실에서 정식으로 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옷을 다 벗기고 군복으로 갈아입힌 채 윤태식은 본격적인 추궁을 당하기 시작했다.
조사실은 지하의 하얀 작은 방이었다. 거기서는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았다. 시간 제한도 없고 조금의 거짓도 바로 조직에 의해 확인되는 곳이었다. 수사국 요원들은 처음부터 의심했다. 북한에서 납치를 하려면 선전효과가 있는 인사라야 했다. 그러나 윤태식은 학력도 경력도 아무것도 없었다.
수사과장은 직접 지하로 내려가 확인했다. 윤태식은 살인을 위장하려다 범의 굴까지 오게 된 것이다. 수사과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고위 간부의 한 건 올리기 같았다. 확인도 하기 전에 기자회견을 해서 조직의 망신을 시킨 것이다. 대통령이 알면 노발대발할 것 같았다. 얼마 전에도 김일성이 죽었다고 잘못된 정보를 발표한 실수가 있었다.
보고를 받은 수사국장도 당혹했다. 단순살인범의 거짓말이 엄청난 정치적 사건으로 증폭되어 버린 것이다. 국장 역시 기자회견을 왜 그렇게 급하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최은희 신상옥 납치사건이나 KAL기 폭파사건같이 수사국에서 최종 확인한 후에 진상을 발표해야 실수가 없었다. 장세동 부장은 치밀한 사람이었다. 한 가지 과제를 주고도 그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문제점 몇십 가지를 예상해서 뽑아보라고 하는 성격이었다.
수사국장은 일단 구두보고를 했다. 그리고 부하 공작관 중 베테랑 한 명을 불렀다. 수사국에는 공작담당이 있었다. 공작관인 그는 모략이나 사건의 뒷수습을 소리 없이 처리하는 전문가였다.
“외국에서 우리 국민이 죽었을 때 시신은 어떻게 처리하지?”
국장이 공작관에게 물었다.
“외무부 영사업무처리지침에 의하면 현지 경찰의 통보에 따라 영사가 본국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보고 받은 외무부에서는 국내 가족을 접촉, 처리방법에 대한 의사를 타진한 후 처리합니다. 처리방법에는 시체를 냉동시켜 국내로 인수하는 방법, 현지 화장 후 유골을 인수하는 방법, 현지 화장 후 뼈를 바람이나 물에 뿌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윤태식의 살인행위가 드러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은 뭘까?”
“국제사회에서 권위가 철저히 실추될 겁니다. 또 기자회견을 체크한 북괴가 가만있겠습니까? 대남비방과 국제적 홍보의 최고 자료죠. 얼마 전 김일성 사망소식을 잘못 알린 것 같은 사태가 재현될 겁니다. 이것마저 드러나면 국민은 안전기획부를 전혀 믿지 않을 겁니다.”
“윤태식을 스타로 만들었는데 말이야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할 수도 없고 그래도 사법처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비밀유지가 불가능합니다. 수사나 공판 기록 같은 자료가 변호사를 통해 공개될 겁니다. 저희 조직에서 만든 서류들은 비밀로 지정하면 통제할 수 있지만 재판기록은 공개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또 수지 김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면 일단은 잠정적으로 덮는 방향으로 해야 하겠군. 그러면 분야별 문제점과 대책은 대강 어떻게 해야 할까?”
국장은 덮기로 결정하고 공작관에게 세부대책을 물었다. 공작관은 그것까지 예상하고 치밀하게 기안을 만들어 왔다. 그가 초안을 국장에게 한 부 내보이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윤태식은 일단 국가보안법상의 잠입 탈출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저희 조직에서 살인에 대한 완벽한 서류들을 작성해 두면 그놈은 꼼짝할 수가 없을 겁니다. 변절할 때는 검찰을 통해 죽일 수 있으니까요. 계속 심리적 위압과 함께 적당한 시점에 원천적인 세뇌가 필요합니다.”
세뇌란 윤태식의 뇌에서 살인의 기억을 빼버리는 것이다.
“조직에서의 고정적인 관리방법은?”
국장이 물었다.
“합법적인 주거제한과 우편검열 그리고 출국금지 사유를 만들어 제도적인 감시망을 구축하고 2인 1조로 전담 감시조를 편성해서 윤태식과 유기적인 연락을 하되 비노출 감시체제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1단계로 윤태식을 계속 관찰하다가 변절 가능성이 없어질 무렵 내보내고 2단계로 특수 관리를 하다가 88올림픽에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될 무렵부터는 방임관리로 농도를 약화시키는 게 좋을 듯합니다.”
“사건 현장인 홍콩 정부와 언론 그리고 수지 김의 가족에 대한 문제가 있잖아?”
노련한 국장은 입체적으로 여러 가지를 물었다.
“홍콩의 수지 김 친구들은 현지 요원을 통해 입을 닫게 해야 합니다. 홍콩의 거점장에게 지시해서 홍콩 정부측 동향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세부적인 대응을 해야 합니다. 이미 해외공작국의 요원 한 명이 현지 출장을 가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홍콩정부에 대해 협조 자세를 취하면서 홍콩 경찰국의 수사 자극 요인은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영구미제사건으로 유도해야 합니다.
우리측에서 홍콩정부에 먼저 수사 진전 상황 및 수사 자료의 제공을 요청하는 척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홍콩정부에서 우리 정부에 수사 자료를 요청할 경우는 사태 진전에 따라 선별적으로 응하는 게 좋겠습니다. 동시에 외교채널을 통해 이 사건이 남북간의 문제임을 강조하여 홍콩경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 신중히 해 줄 것을 요구해 언론에 부각되는 걸 방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론과 수지 김 가족은 어떻게 다뤄야지?”
국장이 물었다.
“홍콩에서 북괴 소행이라는 기사가 송고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내 보도는 축소시키고 단기간으로 마무리시켜야 할 겁니다. 외신을 조정하기는 힘들고 차선책으로 홍콩의 거점장이 국내 언론사 특파원들에게 브리핑 자료를 제공해야 할 겁니다. 그 브리핑 요지도 만들어 봤습니다.”
담당 공작관이 A4지에 타자한 이런 문안을 내놓았다.
‘공작명 마카로니로 불리는 수지 김은 홍콩, 마카오에 거점을 구축하고 납치나 입북 대상자를 물색해서 유인하고 북괴에 인계하던 여자공작원이다. 마카로니는 80년 11월부터 86년 10월까지 26회 일본과 마카오를 왕래했다. 윤태식을 납치하기 위한 공작의 실패로 마카로니의 정체가 노출되어 북괴에 대한 국제적 비난의 우려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북괴는 증거인멸과 공작실패에 따른 책임을 묻기 위해 마카로니인 수지 김을 살해했다. 이와 유사한 공작 사례는 신상옥, 최은희 납치사건 등 현재 30여 건에 이르고 있다. 사전 전모는 곧 밝혀질 것이나 우리 정부는 홍콩 당국에 철저한 조사를 요청중이다.’
“수지 김의 가족들은?”
국장이 치밀한 계획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수지 김이 간첩이라면 그의 국내 가족 및 연고자들에 대해 수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 기회에 수지 김 가족에게 사전교육을 시켜 북한이 자기 가족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언론에 인터뷰를 하게 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윤태식의 가족에 대한 언론의 취재는 수사중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통제해야죠. 그리고 그 이후에 수지 김의 가족 및 연고자에 대해서는 간첩연계 혐의를 씌워 고립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내용들이 공작보고서로 치밀하게 작성되어 승인을 받았다. 공작명은 ‘마카로니 공작’이었다. 수사국장은 일단 사건을 덮고 윤태식은 내보내되 몇 년간 관리할 수 있는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싱가포르 수사국 의사 잎치팡은 수지 김의 시체를 부검했다. 시체의 위장은 비어 있었다. 완전히 소화되었다는 얘기였다. 마지막 식사 후 적어도 세 시간 이후에 죽었다고 추정할 수 있었다. 목의 오른쪽 뒷부분에는 반 매듭으로 묶은 갠버스 벨트가 목 중간 부위에 감겨져 꽉 조여져 있었다. 벨트를 푸니 목 중간에 넓은 끈 자국이 희미했다.
머리가죽의 오른쪽 앞과 머리 뒤 중앙 부위에 심한 좌상이 보였다. 그러나 두개골이 골절되거나 두개골 내 출혈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혀 양쪽에 깨문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심장과 폐의 표면에 미세한 출혈이 발견됐다. 성대파열은 없었다. 의사 잎치팡은 끈의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판정했다.
홍콩경찰은 수지 김의 시체와 유류품 처리문제를 현지 대한민국총영사에게 문의했다. 홍콩 총영사는 외무부 본부에 죽은 김옥분의 오빠를 만나 시체처리에 관해 의논한 후 긴급회신을 해 줄 것을 건의했다. 분야별 문제점과 그 대책을 계획하는 일이었다.
엄상익 변호사